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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중종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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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연 - ?∼1542(중종 37).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남원(). 자는 거원(), 호는 설옹(). 증 좌찬성 양구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제학 양성지()이며, 아버지는 현령 양호()이다. 어머니는 유인로()의 딸이다.

음직으로 진출하여 충의위()에 소속되었다가, 1524년(중종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집의()·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535년에는 공조참판으로 성절사(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536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537년 대사헌으로 왕의 밀지를 받아 김안로()·채무택()·허항() 등을 탄핵하여 처형시켰다.

그 뒤 좌승지·병조판서·이조판서·우찬성·좌찬성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사무에 밝았으며, 특히 병사()에 능하였다. 재상 윤임()과 가까운 사이였으며, 훈구파()의 중심인물로 사림파를 배척하는 활동을 많이 하였다.

 

 

 

2. 이장곤 - 조선전기 대사헌,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벽진(). 자는 희강(), 호는 학고()·금헌()·금재()·우만(). 이신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흥해군사() 이호겸()이다. 아버지는 참군() 이승언()이며, 어머니는 이조참판 이래()의 딸이다.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92년(성종 23) 유자광()에 의해 유장()의 적격자로 천거된 적이 있으며, 1495년(연산군 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02년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04년 교리로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이듬 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이 때 연산군이 무예와 용맹이 있는 이장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해 서울에 잡아올려 처형하려 하자, 이를 눈치채고 함흥으로 달아나 양수척()의 무리에 발을 붙이고 숨어 살았다. 이 해 중종반정으로 자유의 몸이 된 뒤 사가독서(: 문흥을 위해 젊고 재능있는 관료에게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휴가를 내리던 제도)하고, 1508년(중종 3) 박원종()의 추천으로 다시 기용되어 홍문관부교리·교리·사헌부장령을 거쳐 이듬 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512년 중국 산동성에서 도적이 크게 일어나자 그 화가 우리나라에 미칠 것을 걱정해, 비변사에 이를 보고하는 동시에 성곽을 수축하고 양곡을 비축해 대비하도록 건의하였다. 또, 이 해 7월에 야인 2,000여 명이 창성에 침입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맞서 싸워 격파하였다. 이듬 해 이조참판이 되고, 1514년에 예조참판으로 정조사(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15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 해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북쪽 변경의 일을 잘 안다 하여 곧 함경도관찰사로 교체되었다.

1518년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이듬 해 우찬성으로 원자보양관()이 되고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 때 심정()·홍경주() 등에게 속아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데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이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류들의 숙청임을 알고 이들의 처형을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심정 등의 미움을 사서 결국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경기도 여강(: 지금의 여주)과 경상도 창녕에서 은거하였다.

학문과 무예를 겸비해 일찍부터 중종의 신임을 받아 승진이 빨랐으며, 관직을 삭탈당한 뒤에도 귀양을 보내자는 대간의 요구가 관철되지 못하였다. 중종은 이장곤의 재질을 아깝게 여겨 군직()을 주어 유사시에 쓰려고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창녕의 연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금헌집()』이 있다. 시호는 정도()이다.

 

 

3. 이행 - 조선전기 우찬성,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덕수(). 자는 택지(), 호는 용재()·창택어수()·청학도인(). 지돈녕부사 이명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 이추()이고, 아버지는 홍주목사 이의무()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로 교리() 성희()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증광 문과에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예문관 검열·봉교, 성균관전적을 역임하고,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0년 하성절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홍문관수찬를 거쳐 홍문관교리까지 올랐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사간원헌납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고, 이어 함안으로 옮겨졌다가 1506년 초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 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다시 홍문관교리로 등용되고, 이어 부응교로 승진되어 사가독서(: 문흥을 위해 재능있는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하였다.

1513년(중종 8) 다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가 이듬해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사섬시정()을 거쳐 1515년 사간원사간이 되고, 이어 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신진 사류인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 등이 폐비 신씨()의 복위를 상소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어 첨지중추부사·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51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왕의 신임을 얻고 있는 조광조() 등 신진 사류로부터 배척을 받아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충청도 면천에 내려갔다. 이듬해 병조참의·호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홍문관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공조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과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그리고 동지의금부사와 세자좌부빈객()도 겸임하였다.

1521년 공조판서가 된 이후 우참찬·좌참찬·우찬성으로 승진하고, 152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좌찬성을 거쳐 1527년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대제학 등을 겸임하였다. 1530년 『동국여지승람』의 신증()을 책임맡아 끝내고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권신 김안로()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오히려 그 일파의 반격으로 판중추부사로 좌천되고, 이어 1532년 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축출되면서 복관되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이었으나 뒤에 문헌()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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