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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 청.일 전쟁 >의 진행 과정

by 무님 2020.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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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5일 아산 앞바다 풍도에서 일본해군이 청 해군을 기습 선제공격한다. 당시 청은 군함 2척(제원, 광을)은 텐진항을 출발하여 아산만으로 이동 중이었고 이 경로를 파악한 일본 군함 3척(요시노, 나니와, 아키스시마)은 풍도에서 매복해 청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청은 일본과 전운이 감돌고는 있었지만 전쟁중은 아니었고, 선전포고 없이 수송선을 침몰시키는 미친 짓을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병력을 수송했다. 그리고 일본은 그렇게 했다.) 일본해군의 포격을 받은 광을호는 도망가다 화약고가 폭발하여 좌초되고 제원호만 빠져나간다. 뒤이어 또 다른 군함 1척(조강)과 수송선(영국상선 고승)이 나타나 고승호는 격침되었고 조강호는 나포된다. 여기서 고승호 격침이 국제적 논란을 불렀다. 동학군과 싸우러 조선에 가는 제3국 선박을 공격해 침몰시킨 행위에 영국을 비롯한 각국이 항의하고 나섰다. 도고 헤이하치로 대좌가 '만국공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반박하면서 이 사건은 국제 해사 분쟁의 오랜 논쟁거리로 남았다. 고승호에 동승했던 독일인 교관 한네켄 콘스탄틴 폰은 '고승호 격침 직후 탈출한 청국 수병들을 일본군이 구조하기는커녕 사살했다.'고 증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 풍도 해전을 시작으로 7월 28일에는 성환에서 대기 중인 청군 3500명을 오시마 요시마사가 이끄는 일본 육군 4천 명이 공격하여 청군은 5백 명이 죽고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8월 1일에야 양국은 동시에 선전포고 하였으며 곧이어 평양에서 격돌했다.

 

 

 

 

9월 15일 새벽 일본군 1만 7천 명은 평양성에 주둔한 청군 1만 4천 명을 공격했다. 3방향에서 평양성을 공격했고 북부와 남동쪽 지역을 돌파해 모란봉을 점령했으며, 후면에서 예기치 않은 공격으로 청군은 당황하였다.
사전에 이홍장은 자신의 기반인 군사력을 잃을까봐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일본군을 맞아 싸우던 청장 좌보귀가 패사하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섭지초는 일본군에 항복 제의를 하면서 도주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일본군도 상황이 썩 좋지는 못해 잠시 퇴각해 전열을 정비하려고 했는데 청군 대가리라는 작자가 저러고 있으니 바로 밀어붙였고, 24시간의 일방적인 교전 끝에 청군은 을밀대에서 항복하고 일본군이 평양성에 입성한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180여 명에 불과했지만 청군은 2천여 명이 전사하고 4천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나머지 2천 명은 압록강변으로 퇴각하였다.
이 과정에 평양 주민들은 청과 일본군 양측으로부터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9월 17일 황해(압록강 근해)에서 청, 일 양국의 해군이 다시 전투를 벌였다. 정여창의 기함 정원을 선두로 군함 11척이 출전하였고, 이토의 기함 마츠시마를 선두로 군함 10척으로 맞섰다. 양측의 군함 숫자는 비슷했으나 일본 연합 함대가 전체적으로 3천 톤 이상 견실한 순양함들인 반면, 청국은 전함인 정원과 진원을 제외하면 2천 톤 내외 작은 순양함들이었다. 다만, 일본 제국 측은 기함 마츠시마마저 4천 톤대 순양함급이었던 반면에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이었던 정원과 진원은 7천 톤이 넘었기 때문에 개함 전투 능력은 청나라가 좀 더 유리했다. 하지만 6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청나라의 북양함대는 패퇴하였다. 청나라 함대는 5척이 침몰하였고 3척은 1개월 이상 취역할 수 없을 만큼 파손되었다. 반면에 일본 연합 함대는 4척이 손상을 입는데 그쳤다. 전쟁 발발 3개월 전 영국은 청나라에게 순양함 2척을 사라고 권유하였으나, 청나라는 그 돈을 서태후의 생일 축하 비용으로 써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이 2척은 일본이 구입하였고 그 중 1척이 요시노. 정여창은 전투 후 이홍장을 직접 찾아가 병력 증원을 요청하였으나, 이홍장은 거부하면서 단지 위해만 수비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청군은 일본군에게 패전을 거듭했다. 청군의 가장 큰 문제는 전쟁을 이홍장의 회군에 전적으로 일임했다는 점이다. 이홍장은 자신의 지지 기반을 잃을까 우려하여 소극적으로 나섰다. 육군의 경우에는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그러지 못할 것 같으면 무조건 퇴각, 해군의 경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배를 잃지 말아야 하며 대양에서는 싸우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때문에 휘하의 지휘관들은 소극적으로 전투를 벌이다 퇴각하기 일쑤였다. 여기에 청나라 말기에 들어서면서 청군의 부패가 심화되어 훈련도와 사기가 낮은 것까지 더해졌다. 그 때문에 일본군은 진격하며 아무 거칠 것이 없었다. 일본은 먼저 발해만 방면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위해(웨이하이)와 여순(뤼순)을 공격, 점령하기로 결정한다.

일본 해군은 우세한 전력으로 연승하며, 산둥반도의 웨이하이웨이[]까지 점령한 후, 최후로 유공도()의 함대를 격파하여, 결국 북양함대()는 전멸하고 말았다. 청나라 북양수사제독() 정여창()은 항복문서와 함께 모든 군사물자를 일본에 양도하고 자결하였다. 일본군은 랴오둥반도·발해(보하이이)만·산둥반도를 장악하고, 북경·톈진을 위협하였다. 남쪽에서는 펑후섬[]을 점령하고, 끝내는 청국 전체를 정복할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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