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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청.일 전쟁의 결과 < 시모노세키 조약 >

by 무님 2020.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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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 31)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에 원병한  ·일 두 나라는 조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높혀 실권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하였다.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패권을 유지하려고 했으며, 일본은 조선으로 진출하여 제국주의 정책을 확대하려 하였다.

청.일 전쟁이 시작되고 조선에서 군사적 선제공격에 나선 일본은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켜 그 전선()이 만주까지 확대되었으며, 청국이 연패를 거듭하자 미국의 중재로 1895년 2월 1일부터 휴전, 강화를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양국은 3월 30일에 먼저 6개 조항의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휴전기간 동안 강화협상을 진행하여 4월 17일 전문() 11개 조항의 강화조약, 각 3조항의 의정서() 및 별약(), 2조항의 추가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이것이 시모노세키 조약이다.

 

 

 

 

3월 14일 이홍장이 직접 시모노세키로 건너가 굴욕적인 협상을 시작한다. 
이 조약으로 일본 제국은 청의 영향력으로부터 조선을 완전히 분리시켰고, 청나라로부터 엄청난 배상금(일본 정부의 4년치 예산)을 받아내며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섬 할양 등 막대한 이득을 챙기게 되었다. 1871년 받아내지 못했던 최혜국 대우 조항도 삽입했다. 그나마 협상 도중 일본 극우파인 고야마 로쿠노스케라는 자가 이홍장을 저격해 이홍장의 얼굴에 총알이 박히는 바람에 이홍장이 치료를 위해 중간에 귀국하는 사건이 터졌고, 국제 여론이 악화될 것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은 3억냥의 배상금을 2억냥으로 줄이고(이것은 중국 세수의 2년 수입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일본으로선 엄청난 액수를 뜯어낸 셈이다.) 당초 톈진 할양 요구에서 타이완 할양으로 대신하는 합의를 해주어서 이만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일본은 이같은 엄청난 이득을 비밀에 부치고 싶었으나 이홍장이 제3국에게 적극적으로 호소해 조약의 불평등함이 알려졌고, 일본의 세력 확대에 불안감을 갖게 된 러시아 제국 프랑스, 독일 제국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도로 토해내야 했다. 랴오둥 반도의 여순 등은 10년 후 러일전쟁으로 도로 뺏어온다.

 

 

* 시모노세키 조약 내용

제1조.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무릇 조선의 독립 자주 체제를 훼손하는 일체의 것, 예를 들면 조선이 청에 납부하는 공헌, 전례 등은 이 이후에 모두 폐지하는 것으로 한다.

 

제2조. 청이 관리하고 있는 지방(랴오둥 반도, 타이완 섬, 펑후 제도 등)의 주권 및 해당 지방에 있는 모든 성루, 무기 공장 및 관청이 소유한 일체의 물건을 영원히 일본 제국에 양도한다.

 

제4조. 청은 군비 배상금으로 순은 2억 냥을 일본 제국에 지불할 것을 약속한다. 비준 교환 후 6개월 이내에 5천만 냥, 12개월 이내에 또 5천만 냥 잔액은 6년 동안부세하며, 미지불분에 대한 이율은 연 5%로 한다.

 

제5조. 본 조약의 비준서 교환 후 2년 내에 청에서 일본 제국으로 할양된 지역의 인민 중에서, 할양지 이외의 지역으로 이주하려는 자가 그 재산을 매각하여 그 할양지 밖으로 이주하는 것을 일본은 허락한다. 그러나 기한을 넘어서도 이주하지 않는 경우에는 일본 신민으로 간주한다.

 

제6조. 청 · 일 양국 간의 기존의 조약들은 이번 전쟁에 의해 자동적으로 폐기된다. 양국의 새로운 통상 조약은 청과 서양 제국 간의 조약을 견본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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