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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태조의 책사, 정몽주

by 무님 2020.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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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이다.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단심가〉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본관은 영일(). 출생지는 영천(). 초명은 정몽란() 또는 정몽룡(), 자는 달가(), 호는 포은(). 추밀원지주사() 정습명()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이다. 어머니 이씨()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정몽란이라 했다. 뒤에 정몽룡으로 개명하였고 성인이 되자 다시 정몽주라 고쳤다.

 

1357년(공민왕 6) 감시(: 일명 국자감시로 진사를 뽑던 시험)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1362년 예문관()의 검열()·수찬()이 되었다. 이때 김득배()가 홍건적을 격파해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의 음모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김득배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시체를 거둘 수 있도록 청해 장사지냈다.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위위시승()을 역임하였고 동북면도지휘사(使)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여 서북면에서 달려온 병마사 이성계()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가하였다. 돌아와서 전보도감판관()·전농시승()을 역임하였다.

당시 상제()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을 입었는데,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를 살고 슬픔과 예절을 극진히 했기 때문에 1366년 나라에서 정려(: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를 내렸다. 이듬해 예조정랑()으로 성균박사를 겸임하였다.

태상소경()과 성균관사예()·직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372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정몽주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경상도안렴사(使)·우사의대부() 등을 거쳐,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으로 이인임()·지윤()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왜구의 침구가 심해 나흥유()를 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했으나 그 주장()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정몽주에게 앙심을 품었던 권신들의 추천으로 구주(: 현재 일본의 큐수지역)지방의 패가대()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건너가 교린()의 이해()를 설명해 맡은 임무를 수행했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이어 우산기상시()·전공사()·예의사()·전법사()·판도사()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380년 조전원수()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듬해 성근익찬공신()에 올라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使)이 되었다. 1382년 진공사(使)·청시사(使: 전왕의 시호를 요청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로 두 차례 명나라에 갔으나 모두 입국을 거부당해 요동()에서 되돌아왔다.

동북면조전원수로서 다시 이성계를 따라 함경도에 다녀온 뒤, 1384년 정당문학()에 올라 성절사(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을 증액하고 있었고,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시키는 등 고려와의 국교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이에 모두 명나라에 봉사하기를 꺼려했으나 사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긴장상태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5년 동지공거()가 되어 우홍명() 등 33인을 뽑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해 결국 관철시켰다.

귀국 후 문하평리()를 거쳐 영원군()에 봉군되었다. 그러나 한 번 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다시 국교가 악화되는 바람에 요동에서 되돌아왔다. 삼사좌사(使)·문하찬성사()·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워 이듬해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영서운관사(使)로 익양군충의군()에 봉군되고,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의 호를 받았다.

이초()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당시 조정에서 물러난 구파정객들에 대한 대간()의 논죄가 끊임없이 계속됨을 보고 이를 부당하다고 말했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았다. 이에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충의백(使殿 )이 되었다.

당시 풍속이 모든 상제()에 불교의식을 숭상했는데, 사서()로 하여금 『가례()』에 의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요청해 예속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힘썼다. 또 지방수령을 청렴하고 물망이 있는 사람으로 뽑아 임명하고 감사를 보내 출척()을 엄격하게 했으며 도첨의사사(使)에 경력과 도사를 두어 금전과 곡식의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다.

서울에는 오부학당()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하였다. 그리고 기강을 정비해 국체를 확립하였으며 쓸데없이 채용된 관원을 없애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의창()을 다시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을 설치해 조운()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調)이 되고, 안사공신()의 호를 더했으며, 이듬해 『대명률()』·『지정조격()』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수정해 신율()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남은()·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왕석()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의 우익()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역으로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였으나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에게 살해되었다.

 

                                                                        단심가

 (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여지) 

 

이몸이 죽어죽어 일백번() 곳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넉시라도 잇고업고
님향(향) 일편단심()이야 가싈 줄이 이시라

 

 

정몽주의 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에 있는 고려시대 문신 정몽주의 묘가 있다. 1972년 5월 4일 경기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재화가 관리한다. 정몽주가 고려 왕실을 지키려 하다가 개성 선죽교에서 타살된 뒤 1406년(태종 6) 3월, 풍덕군()에 추장하였던 묘소를 지금의 자리에 옮겨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하였다. 묘소는 단분()으로 상석, 혼유석, 망주석, 문인석 등이 종전부터 있었으며 곡담과 둘레돌 등은 1970년에 추가 설치한 것이다. 1980년에는 묘역의 민가 3채를 이전하고 신도비각, 재실() 등 대대적으로 정화 사업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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