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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5

인조시대 관련 인물 - 대동법 시행한 김육 김육은 조선 중기 형조참의, 병조참판,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실학자이다. 17세기 후반의 공납제도의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 대동법 실시를 주장하였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회정당(晦靜堂).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4대손이며, 할아버지는 군자감판관 김비(金棐)이고, 아버지는 참봉 김흥우(金興宇)이며, 어머니는 현감 조희맹(趙希孟)의 딸이다. 김육은 1580년 7월 14일 한양(옛 서울) 마포에 있는 외조부 조신창(趙新昌)의 집에서 태어났다.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혹은 회정당(晦靜堂)이다. 김육은 다섯 살 때 이미 천자문을 외우는 비상한 자질를 타고난 아이였다. 1588년 조부인 김비(金棐)가 강동 고을 수령이 되자 부친.. 2020. 5. 25.
광해군, 대동법 시행 대동법은 조선시대에 공물(貢物: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이다. 조선시대 공물제도는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는데, 생산에 차질이 생기거나 자연재해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경우에도 반드시 특산물로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공물의 이런 폐단을 이용한 관리나 상인이 백성을 대신하여 공물(특산물)을 나라에 바치고 그 대가를 몇배씩 가중하여 백성에게 받아내는 방납(防納:代納)이라는 제도가 있어 백성의 부담이 한층 가중되었다. 더구나 거주지에서 생산되지도 않는 공물을 배정하여 백성을 착취하는 관리가 많았다. 이런 관리들의 모리 행위는 농민의 부담은 가중되었지만 오히려 국가 수입은 감소되었다. 결국 중간 관리와 상인들만 이익을 보는 조세제도는 조선에서 가장 심각한 폐단이었다. 17세기 초.. 2020. 5. 8.
조선 16대 왕 - 인조 조선의 제16대 왕(재위 1623~1649) 인조는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 정책을 썼다. 난국 속에서도 군제를 정비해 총융청 · 수어청 등을 신설했으며, 북변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하여 여러 곳에 진을 신설했다.《동사보편》등의 서적도 간행되었고, 송시열 · 송준길 등의 대학자·대정치가가 배출되기도 했다 인조는 반정이라는 거사를 직접 진두지휘 하였다. 인조는 계획이 여러 사람들 입을 통해 누설될 위기에 처해지자 서두를 수 밖에 없었고 조바심에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인조는 예정일 보다 일찍 반정을 일으켰고 이런 탓에 치밀하지도 못한 느낌이지만, 군왕이었던 광해군은 무방비 상태였다. 광해군이 도망간 이상, 인조는 왕위에 오른 것이나 진배없었다. 1623년 김류(金瑬)·김자점(金自點)·이.. 2020. 4. 10.
광해군, 대동법의 시행하다 임진왜란을 겪고 조선의 어느 한곳 멀쩡한 곳이 없었다. 광해군은 왕위에 올라 세금개혁의 일환이라 할 수 있는 대동법을 시행한다. 대동법이란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세금 제도이다 대동법을 이해하려면 공납을 알아야 한다. 공납이란 그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특별한 상품인 특산품을 세금으로 걷는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나거나 흉년이 들어 특산품을 생산하지 못한 경우 세금을 낼 수 없게 되어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렇다고 다른 물건으로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라에서 걷어야 할 물건의 종류와 수가 정해져 있어 함부로 다른 물건을 대신 바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공납을 내지 않으면 더 큰 벌을 받게 되기 때문에 다른 마을에서 물건을 사서 바치거나, 아니면 중간 상인.. 2020. 3. 28.
광해군, 개혁과 중립외교를 펼치다 임진왜란이 한참 일어나고 있는 시기 14대 임금 선조는 의주로 도망을 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영변(寧邊)에서 갈라졌다. 선조는 의주로 향하고 광해군은 권섭국사(權攝國事)의 직위를 맡아 분조(分朝)의 책임자로 평안도 지역으로 출발하였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을 수복한 후 무군사(撫軍司)의 업무를 담당하여 수도 방위에도 힘을 기울였다. ;1597년 정유재란(임진왜란 중 왜군의 2차 침략을 따로 부르는 말)이 일어났을 때는 전라·경상도로 내려가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 2020. 3.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