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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외교2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강홍립 장군 광해군은 선조의 적장자였던 영창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명나라가 쇠퇴하고 후금이 세를 일으키던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두 세력의 중간에서 균형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것을 중립외교란 한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사림들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폐위된다. 광해군은 왕족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전쟁을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의 대외정책 제1순위는 전쟁 발생 방지였다. 당시 동아시아의 세력도는 요동치고 있었다. 명나라는 조선 파병으로 재정이 고갈되어 약해지고 여진족은 급격하게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마침내 여진족은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에 선전포고까지 한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를 전쟁에서 조선을 구해준 슈퍼 히어로로 생각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후금을 막을 지원병.. 2020. 3. 28.
광해군, 개혁과 중립외교를 펼치다 임진왜란이 한참 일어나고 있는 시기 14대 임금 선조는 의주로 도망을 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영변(寧邊)에서 갈라졌다. 선조는 의주로 향하고 광해군은 권섭국사(權攝國事)의 직위를 맡아 분조(分朝)의 책임자로 평안도 지역으로 출발하였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을 수복한 후 무군사(撫軍司)의 업무를 담당하여 수도 방위에도 힘을 기울였다. ;1597년 정유재란(임진왜란 중 왜군의 2차 침략을 따로 부르는 말)이 일어났을 때는 전라·경상도로 내려가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 2020. 3.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