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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기록3

병인박해에서 병인양요로 병인박해는 1866년 조선 조정(朝廷)에서 가톨릭 교도를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원인(遠因)은 당시 시베리아를 건너온 러시아의 남하(南下)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1864년(고종 1)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 교도들은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를 한·불·영 3국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으니 당시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조정에서 이미 러시.. 2020. 11. 8.
천인이 재상에 오른다 전통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여서 귀족이나 양반이 관리로 임용되고 노비 등의 천인은 절대 관리가 될 수 없었다고 다들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조선 건국 직후에는 각종 법규 등이 제대로 정비되지 못해서였는지 천인이 관리가 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조선 건국 직후 궁중에서 잡일을 하는 노비인 내노 이덕시가 의성고 별감, 한장우가 보화고 별감, 이생이 의순고 별감에 임명된 적이 있다. 정조 1년 10월 사헌부에서 공인, 상인, 노비 등에게 벼슬을 주지 말고 관직을 해임할 것을 청하였다. "공인, 상인, 종들이 조정에 뒤섞이는 것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임금의 윤허를 받지는 못했다. 태종 때는 가죽을 다루는 장인이었던 임지의가 충청도 보령 감무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는 집안 계통이 분명치 않다는 이유로 사간원.. 2020. 8. 7.
조선 시대에도 인사 청문회가 있었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 신임각료 후보자들에 대한 인사 청문회가 열린다. 국무총리나 각 부의 장관 등은 국회의 인사 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투기나 편법 증여 등의 불법적인 재산 축적, 자신과 자녀들의 부정한 군 면제, 논문표절, 부적절한 처신 등으로 청문회의 두꺼운 벽을 넘지 못하고 낙마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곤 한다. 낙마한 공직 후보자들은 남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고위직에 거의 접근하였다가, 청문회라는 복병을 만나 거의 이룬 꿈을 내려놓아야 해서 아마도 땅을 치고 후회하였을 것이다. 요즘은 국회 청문회 이전에 이미 언론이 비리를 낱낱이 파헤치는 바람에 스스로 물러나는 공직자들도 많다. 언론에 의한 검증이 국회 청문회보다 무섭다고 한다. 철저한 자기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조선시대에도 현.. 2020. 8.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