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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의 시 이색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여말 3은 중의 하나다. 이성계와는 친숙한 사이였다.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났고, 14세에 성균관 시험에 합격한 준재였다. 그는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후 여러 차례 출사를 종용받았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망국에 대한 시에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기 전 전공을 찬양한 시가 여러 편 남아 있다. 이성계가 운봉 싸움에서 왜구의 적장 아기발도를 죽이고 개선했을 때, 권근. 김구영. 이색 등 당대의 문관들이 시를 지어 하례했다. 이색의 시는 찬사의 극치였다. 적을 소탕하는 썩은 나무 꺾기 같았네 삼한의 기쁜 기색, 여러분에게 달렸소 백일 같은 그 충성, 하늘에 안개 걷히고 청구에 떨치는 위엄, 바다가 잔잔하오 빛난 자리에 무공을 칭송하는 오래요 능연각 높은 집에 영웅의 화.. 2020. 7. 17.
태조. 정종 시대 관련 인물 1 1. 권근 - 본관 안동. 자 가원(可遠) ·사숙(思叔). 호 양촌(陽村). 시호 문충(文忠). 초명 진(晋). 1367년(공민왕 16)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급제, 춘추관 검열이 되고, 우왕(禑王) 때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 ·예의판서(禮儀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창왕(昌王) 때 좌대언(左代言)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밀직사첨서사(密直司僉書事)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5년(우왕 1) 박상충(朴尙衷) ·정도전(鄭道傳) ·정몽주(鄭夢周)와 같이 친명정책(親明政策)을 주장하여 원나라 사절의 영접을 반대하였고, 1389년(창왕 1) 윤승순(尹承順)의 부사(副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올 때 가져온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이 화근이 되어 우봉(牛.. 2020. 7. 16.
태조 이성계가 만든 충신 두문동 72현 (야사이야기) 충절을 상징하는 두문동은 경기도 개퐁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예 지명이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을 반대했던 고려 유신 신규. 신혼. 신우. 신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성사재 등 72현이 두문동에 들어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며 살았다. 새 왕조에 있어서는 두문동이 눈엣가시였다. 아무리 회유책을 쓰고 높은 관직을 준다 해도 반응이 전혀 없었다. 이성계는 생각다 못해 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려는 뜻도 있었으나, 고려의 충절 높은 유신들을 끌어안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과거를 치르는 날 이성계는 초노한 마음으로 두문동의 인재들이 나타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이성계의 짝사랑일 뿐이었다. 두문.. 2020. 7. 15.
태종 야사 - 스승의 깊은 뜻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 것인가?' 고려 말 젊고 패기에 찬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망을 가슴에 품고 그 뜻을 이루려 조정의 중신들을 비롯한 노장군 최영과 은근히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국운은 서서히 기울어져 가고 민심은 흉흉해져 백성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도 소위 나라의 녹을 먹는 벼슬아치라고 하는 이들은 제 밥그릇 챙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운곡 원천석은 이런 세태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안타까워 가슴을 치며 탄식했다. '어허,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으리.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백성들의 안위를 바로 헤아리지 못한다면 차라리 백성들과 함께 농사를 짓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원천석은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치.. 2020. 7. 14.
여수 예술공원 그리고 여수 카페 < 갤러리안 > 안녕하세요. 무님의 여행이야기 과 카페 을 소개합니다. 이른 봄 가족 여행으로 여수로 떠났다. 여수역에 내려 렌트를 하고 만성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만성리 해수욕장은 여수엑스포역에서 해안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3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다. 길이 540m, 폭 25m 정도의 백사장과 평균수온 25℃로 따뜻해서 해수욕장으로는 최적지이다. 특히, 이곳의 백사장에 깔린 검은 모래는 원적외선의 방사열이 높아서 모세 혈관을 확장시켜 혈액순환을 돕고 땀의 분비를 촉진시켜 준다고 한다. 그래서 신경통이나 각종 부인병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 효험이 절정에 이르는 매년 음력 4월 20일(양력 5월 하순~6월 초순사이)이면 검은 모래가 눈을 뜬다 하여 검도모래찜질 한마당이 펼쳐진다. 해변 주변에 .. 2020. 7. 13.
환국으로 왕권 강화 < 숙종의 업적 > 숙종은 수차례의 환국으로 조정 대신들을 교체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을 통해 붕당 간의 견제와 균형이 붕괴되고 숙종은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절대적 권력을 휘둘렀지만 그의 여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희생되었다. 숙종은 붕당을 누르고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다. 그 도구로 선택한 방식이 바로 ‘환국’이였다. 환국은 왕이 조정의 대신들을 손바닥 뒤집듯이 전면적으로 교체하는 걸 뜻한다. 이전까지의 왕들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몇 명만 파직했지만 숙종은 대부분의 관리들을 모조리 바꿨다. 그러니 남인이 집권했다가 졸지에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는 상황이 연출되었 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여당이 있어도 야당이 여전히 목소리를 내면서 세력간에 견제와 균형을 맞췄는데 숙종 때부턴 여당만 있는 상.. 2020. 7. 11.
숙종 20년 갑술환국 갑술환국은 1694년(숙종 20) 폐비민씨(廢妃閔氏)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南人)이 화를 입어 실권(失權)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이다. * 조선왕조실록 그날의 기록 발단은 음력 3월 23일, 우의정 민암이 서인 노소론이 함께 민심을 불안케 하는 풍문을 퍼뜨리고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서인 함이완의 밀고를 받으면서 일어났다. 숙종은 이들을 모두 체포하여 의금부에서 엄히 조사하고, 특별히 엄중한 형벌을 쓰라고 명하였다. 3월 25일 우윤 겸 포도대장이자 중전 장씨의 오라비 장희재가 소론과 왕래한 것을 사죄했으나 숙종은 되려 위로 했으며 뇌물 수수 혐의도 다음날 국문에서 부정되었다. 그리고 노론의 김춘택과 지방의 거부 출신 무인 이시도, 소론의 한중혁 부자 등이 줄줄이 끌려왔다. 이 과정에서 .. 2020. 7. 10.
태화산을 아름답게 만드는 절 < 마곡사 > 마곡사는 충청남도(忠淸南道) 공주시(公州市) 사곡면(寺谷面) 운암리(雲岩里)의 태화산(泰華山)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본사(本寺)이다. ‘春마곡’이란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봄볕에 생기가 움트는 마곡사의 태화산은 나무와 봄꽃들의 아름다움이 빼어 나다. 마곡사 사적입안(事蹟立案)의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640년(백제(百濟) 무왕(武王) 41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고려 명종(明宗) 때인 1172년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수하고 범일(梵日) 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 (覺淳) 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신라의 고승 자장 율사가 창건할 당시만 하더라도 30여 칸에 이르는 대사찰이었으나 .. 2020. 7. 9.
숙종 15년 기사환국 기사환국은 1689년(숙종 15) 남인(南人)이 희빈장씨의 소생인 원자(元子) 정호(定號)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이며 숙종대에서 두 번째로 일어난 환국이다. 숙종은 즉위한 뒤 김만기(金萬基)의 딸을 왕비(王妃: 仁敬王后)로 맞았으나 1680년 10월에 왕비가 죽자,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계비(繼妃: 仁顯王后)로 맞았다. 그 때 김만기·민유중 등은 모두 노론계였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원자를 낳지 못하는 가운데 1688년에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게 된다. 발단은 장희빈의 아들(훗날의 경종)의 원호를 정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원호를 정한다는 것은 곧 이 아들을 숙종의 공식 후계자인 왕세자로 지정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당연히 아직 강보에 싸인 후궁 소생의 왕자에.. 2020. 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