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639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비겁함과 친명정책 7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전 국토는 황폐해졌다. 전쟁 이후 나라를 지킨 자와 자신을 지킨 자는 분명히 구분되었다. 하지만 선조는 나라를 지키 이들을 외면했다. 당신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에 공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경상도 지역에서 많은 의병이 일어났지만 이들에 대한 홀대가 심했다. 결국 전쟁 이후에 의병은 오히려 몸을 숨겨야 했다. 또한 전쟁 당시 앞장서서 싸운 선무공신보다 선조를 따라 피난 갔던 호송공신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전쟁 승리의 모든 공을 명나라에게 돌렸다. '아버지 명나라가 있기 때문에,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면 오늘날 조선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거다. 이때부터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 을 강조한게 된다. " 이제 통보하기를 우리나라가 중국이 아니었다면 이들 적을 끝내 죽여.. 2020. 3. 21. 임진왜란의 종결과 조선의 상황 임진왜란은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명·일본 등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하기 시작한 사회가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로 나타났다.전화(戰禍)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국적으로 전야(田野)가 황폐화되었다. 사회적으로는 군공이나 납속으로 서얼허통(庶孽許通), 향리(鄕吏)의 동반직(東班職) 취임, 병사의 면역, 노비의 방량(放良) 등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해져갔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다. 역대 실록을 포함하여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한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난중의 민중의 생활은 더욱 궁핍하여 인상.. 2020. 3. 21. 조선 14대 왕 선조 - 정유재란 조선 14대 왕 선조 시대에는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특히 왜의 침입인 임진왜란은 내외적으로 혼란하고 전쟁에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더욱 치열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잠시 휴정에 들어가지만 일본 다시 침략해 온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정유년에 일어난 왜의 침입일하여 정유재란이라 한다. 1597년 화의 결렬로 일본의 도요토미는 재침의 명령을 내렸다. 먼저 가토·고니시·소 등을 장수로 한 1만 4500명의 군사를 선봉으로 정월 15일 조선을 침략하였다. 가토는 울산·죽도의 구루(舊壘)를 수축하고 부산의 수병(戍兵)을 합하여 잠시 기장에 주둔했다가 이어 양산을 거쳐 울산 서생포에 들어가 둔진하였다. 고니시는 앞서 지난해 말에 두모포(豆毛浦)로 상륙하여 2월에 부산의 원영(原營)을 수복하고 영주.. 2020. 3. 21. 임진왜란의 휴전 성립 앞서 선조는 피난 도중에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에서는 파병 여부의 의논이 분분했으나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주장으로 원병을 파견하였다. 이에 요양부총병(遼陽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은 5,000의 병사를 이끌 고 고니시의 본거지인 평양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들 원병은 명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군사는 아니고 국경 수비병이었다. 그들은 1592년 7월 15일 평양에 도착하여 풍우가 심한 밤을 이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적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우참장(右參將) 대조변(戴朝弁)과 유격(遊擊) 사유(史儒) 등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조승훈이 잔여병을 거두어 퇴각하니 1차 구원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고니시는 임진강에서 대진하고 있을 때와 대동강에 이르러 두.. 2020. 3. 21. 임진왜란의 발발 조선은 일본의 태도를 심상치 않게 여기고 1590년 동인의 김성일과 서인의 황윤길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한다. 그리고 이들은 1년 뒤인 1591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에 선종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난 일을 보고한다. 그런데 문제는 김성일과 황윤길인 상반된 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 상이 하문하기를 "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어썽헤 생겼던가?" 하니, 윤길이 아뢰기를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하고, 성일은 아뢰기를 "그이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의 앞날의 크나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은 김성일의 의견을 받아들이는데 이는 누구도 전쟁에 대한 중압감과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고 또한 민심이 나빠질가 걱정.. 2020. 3. 21. 임진왜란의 배경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중쇠(中衰)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 세력간에 계속된 정쟁으로 인한 중앙 정계의 혼란,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했으나, 이것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이(李珥)는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 2020. 3. 21. 정여립 모반사건과 동인의 분열 선조가 즉위하고 훈구세력이 약해지며 사림의 시대과 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면서 붕당이 시작된다. 그런데 동인은 한번 더 갈라지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한번 더 나뉘게 되는 것이다. 이 사건의 바로 1589년에 이러난 이다. 정여립의 본관은 경상도 동래(東萊)고, 자는 인백(仁伯)이다. 아버지는 군수ㆍ첨정(僉正, 종4품) 등을 지낸 정희증(鄭希曾)이다. 전주에서 태어났고 대동계(大同契)의 거점이자 피난했다가 죽음을 맞은 곳도 진안(鎭安) 죽도(竹島)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정여립의 지역적 기반은 전라도였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상당히 순조롭게 출세했다. 1570년(선조 3년) 우수한 성적(5등)으로 문과에 급제했다. 24세의 나이였다. 조선.. 2020. 3. 20. 선조, 사림의 시대와 붕당 발생 선조는 조선의 27명의 임금 중에서 4번째로 즉위기간이 긴 왕이였다. 영조의 재위기간은 51년 7개월 ( 1724 ~ 1776 ) 숙종의 재위기간은 45년 10개월 (1674 ~ 1720 ) 고종의 재위기간은 43년 6개월 ( 1863 ~ 1907 ) 선조의 재위기간은 40년 7개월 ( 1567 ~ 1608 ) 선조 시기에는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는 가 시작 된 것과 붕당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사림은 지방에서 중앙으로 등용된 원리원칙주의자 성리학자들이다. 제 9대 왕인 성종 대부터 중앙에 등용되었지만, 제 10대 연산군부터 제 13대 명종 대까지 총 4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수많은 사림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제 13대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 2020. 3. 19. 조선 14대 왕 선조 - 이균, 이연... 방계출신이 왕이되다 조선의 14대 왕 선조는 1552년에 태어나 1608년에 사망했다. 그의 재위기간은 40년 7개월이다. 선조는 조선 11대 중종의 손자로, 아버지 덕흥대원군은 후궁 창빈 안씨의 소생으로 인종, 명종과는 이복형제 사이이다. 명종이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나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이 왕이 되었는니, 조선 최초로 방계 출신의 임금이기도 하다. 본래 이름은 '균'이었으나. 당시 중국 명나라 황제의 이름이 '주익균'이었기 때문에, '연'으로 개명한다. 그가 재위하던 시기에 조선 왕조를 뒤흔든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선조의 시호는 소경(昭敬)이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岹)의 셋째 아들이니 즉 중종의 손자(셋째 아들 계)이다(중종의 첫째 아들은 12대 인종, 둘째 아들은 13대 명종). 어머니는 영의정.. 2020. 3. 19. 이전 1 ··· 60 61 62 63 64 65 66 ··· 7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