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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다 명종이 재위하던 시기는 나라 안팎으로 많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때이다. 밖으로 왜의 침입이 있었은데 이를 을묘왜변이라 한다. 안으로는 임꺽정의 난이 일어난다. 임꺽정의 난은 16세기중반 황해도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표적인 농민무장대의 활동으로 조선에서 일어난 반란중에서도 꽤 장기적으로 지속된 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활동기록이 보이는 것은 1559년(명종 14)부터이다. 본래 황해도는 사신들이 중국으로 오가는 길목이어서 그 비용을 대느라 다른 도에 비해 백성들의 부담이 컸다. 또 임꺽정이 활약한 봉산·재령에서는 바닷가에 있는 갈대밭마저 권세가들이 차지하여, 갈대로 삿갓과 삿자리를 만들어 생활해 나가는 백성들은 갈대를 사 써야 했다. 당시 임꺽정은 갈대를 엮어서 생활도구를 만드는 일을 했는데, .. 2020. 3. 19.
명종, 을묘왜변이 일어나다 명종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며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명종의 재위기간 22년은 나라 아팎으로 혼란이 컸다. 안으로는 왕실 외척의 폭정이 심했고, 탐과오리들이 득세했으며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는 등 각종 비리가 난무했다. 게다가 밖으로는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때 일어난 것이 을묘왜변이다. 을묘왜변이란 조선 명종 때 왜구가 전라남도 영암·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한 사건을 말한다. 을묘왜변의 배경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점과 일본 국내 사정의 혼란에서 일어났다. 조일 관계에서 보면 1544년(중종 39) 왜인들의 약탈로 야기된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으로 조선에서는 그들의 내왕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사죄와 통교 재개 허용을 바라는 간청을 받.. 2020. 3. 18.
명종, 대윤과 소윤의 싸움, 을사사화 조선의 12대 왕 인종이 9개월의 짧은 재위기간을 끝으로 승하하고 13대 왕으로 명종이 즉위를 하게 되면서 권력다툼의 끝을 보여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을사사화라 할 수 있다. 을사사화는 기본적으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거기에는 외척이 깊이 개입했다. 명종의 즉위(1545년) 직후 시작된 그 사화는 2년 뒤 정미(丁未)사화까지 지속된 장기적인 정치 투쟁이었다.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정계에서 쫓겨난 문정왕후(文定王后)측의 세력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 형제는, 김안로가 실각한 뒤 다시 등용되어 점차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국은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친정인 대윤(大尹)파와 윤지임(尹之任)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의 친정인 소윤(小尹)파로 갈라져 외척간.. 2020. 3. 18.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임금 위의 여왕 본관은 파평(坡平), 성은 윤(尹), 윤지임(尹之任)의 딸이며 명종의 어머니이다. 1517년(중종 12)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죽고 12살에 명종이 즉위하자 모후(母后)로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때 남동생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윤(大尹)이라고 하는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문정왕후는 신하들이 주도한 반정 덕에 왕위를 차지하게 된 왕, 중종이 세 번째로 맞은 왕비였다. 중종의 첫 번째 왕비는 단경왕후신씨였는데 연산군 때의 권신 신수근의 딸이었다는 이유로 폐출되었다. 중종과 단경왕후는 서로 사랑하였지만 신하들에 의해 택군(신하들이 왕을 선택한다는 의미)된 왕은 자신의 아내를 지킬 힘이 없었고 결국 중종은 신씨가 폐서인이 .. 2020. 3. 18.
조선 13대 왕 명종 - 이환 명종은 조선 제11대 중종의 두 번째 적자로 어머니는 문정왕후 윤씨이다. 인종은 후사를 두지 못하고 승하한 후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 13대 임금, 명종이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했다. 그 시기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들의 부정부패가 심했고, 을사사화가 발생하는 등 사화가 극도로 어지러워진다. 명종의 재위기간은 1545~1567년이다. 이름은 이환(李峘), 자는 대양(對陽)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비는 인순왕후(仁順王后)로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이다. 중종(中宗)의 둘째 적자(嫡子)이며 인종(仁宗)의 아우이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와의 사이에서 인종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와는 명.. 2020. 3. 18.
조선 12대 왕 인종 - 이호 인종은 조선 11대 중종의 장자로 어머니는 장경왕후 윤씨이다. 중종은 후궁인 경빈 박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맏아들 복성군이 있었지만, 정비의 소생인 인종을 왕세자로 앉힌다.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숨져 후에 문정왕후가 새 어머니가 된다. 인종은 6세에 왕세자가 되었지만, 새어머니인 문정왕후가 경원대군(훗날의 명종)을 낳은 후에 입지가 불안해진다. 결국 힘겹게 왕위이ㅔ 오르지만, 불행히도 즉위한지 9개월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재위기간은 조선의 27명의 임금 중에서 가장 짧았다. 인종의 본래 이름은 이억이였다. 인조의 어머니인 장경황후는 인종을 낳은 지 불과 7일 만에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녀는 눈을 감기 전 남편인 중종에게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다. .. 2020. 3. 17.
중종의 남자 조광조 기묘사화로 죽다 조광조는 조선 중종 때 사림의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 정치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천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현량과를 주장하여 사림 28명을 선발했으며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들의 공을 삭제하는 위훈삭제 등 개혁정치를 서둘러 단행하였다. 사흘 후 기묘사화가 일어나 능주로 귀양갔으며 한달만에 사사되었다. 본관 한양.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2020. 3. 16.
중종의주요정책과 사건과 중종의 묘 중종의 재위기간은 재위기간은 38년 2개월이 였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반정의 훈구세력들이 강압은 거침이 없었다. 중종이 사랑한 부인 단경왕후 신씨를 폐위를 시킬만큼 반정 신하들의 강압적 자신들의 뜻대로 하려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중종은 이에 굴하지 않고 왕위에 오른지 10년이 되는 해인 1515년(중종 10),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중용하여 새로운 왕도정치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중종은 조광조 일파를 등용한 초기에는 미신 타파를 위하여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고, 향촌에 향약(鄕約)의 실시를 권장하였다. 재위 후기에는 군적(軍籍)의 개편과 전라도ㆍ강원도ㆍ평안도에 대한 양전(量田, 토지조사)을 실시하였으며, ▲진(鎭)의 설치 ▲성곽의 보수 ▲평안도 여연ㆍ무창 등지의 야인을 추방하는 등 국방정책에.. 2020. 3. 16.
중종의 조강지처 단경왕후 신씨 그리고 치마바위 연산군의 폭정이 지속되자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을 중심으로 반정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때 목숨만 겨우 버티던 왕자였던 중종이 하루 아침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때 중종의 나이 19세였다. 중종은 한 번도 정식으로 왕위 수업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저 무능한 형을 대신해 신하들에게 떠밀리다시피 왕이 된 것이었다. 즉 정통성을 이어받은 왕이 아닌, 그저 신하들의, 신하들에 의한, 신하들을 위한 임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중종은 조강지처까지 버려야 했다. 중종의 왕비 신씨는 반정 때 반정군에 죽임을 당한 신수근의 딸이었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장인 신승선의 아들로 연산군과 처남 남매 간이었다. 신씨는 1487년인 성종18년 1월 14일 신수근의 딸로 태어났다. 1449년인 연산군5년 진성대군과 가례를.. 2020.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