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639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 < 의병 > 의병이란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일어나 싸운 의로운 병사들을 뜻한다. 양반과 상민, 천민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참여했으며, 특히 임진왜란과 일제 침략기에 크게 활약했다. 1592년 4월 13일에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왜군은 불과 수십 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고, 곧이어 평양까지 쳐들어가 한반도 대부분을 차지했다. 외적이 우리 땅을 차지하고 우리 민족을 죽이는 것을 본 사람들은 스스로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특히 지방에서 어른 역할을 하던 양반 유학자들이 의병 활동을 주도했다. 의병은 처음에는 자기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모였다. 마을을 이루고 있던 양반과 농민, 노비들이 모여 군대를 만든 것이다. 이 의병들을 이끄는 대장은 대부분 그 마을에서 이름이 높았던 양반들이 맡았다. 그러다가 여.. 2020. 3. 23. 유성룡 <징비록>>을 쓰다 유성룡은 조선 시대의 문신이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우의정 자리에 오른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총책임관을 맡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인 을 썼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1542년(중종 37) 10월에 의성현 사촌 마을의 외가에서 아버지 유중영(柳仲郢, 1515~1573))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58년 17세 때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혼인했다. 형은 유운룡(1539-1601)이다. 부친인 유중영은 1540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의주목사ㆍ황해도관찰사ㆍ예조참의를 두루 거친 강직한 관료였다. 유성룡은 어린 시절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가학(家學).. 2020. 3. 23. 이순신장군 명량대첩, 노량해전 그리고 생을 마치다.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하는 동안에도 전란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에서 희망은 이순신장군뿐임은 자명한 일이였다.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함으로써, 이순신이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순신은 초계(草溪)에서 이 소식을 듣고, “우리가 믿은 것은 오직 수군인데 그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었구나.” 하며 통곡하였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朝野)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왕은 비국대신(備局大臣)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당황하여 바로 대답도 못하였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만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 2020. 3. 23. 이순신장군 백의종군 그리고 <난중일기> 임진왜란이 일어나 있는 상황에서도 붕당으로인한 조정은 혼란하기만 했다. 붕당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과를 놓고서도 논의가 분분했다. 특히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조정은 원균을 충청 절도사(忠淸節度使)로 옮겼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대체로 원균의 편에 서서 여러 차례 이순신을 탄핵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요시라(要時羅)라는 인물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오니 수군을 보내 이것을 막으라는 계책을 조정에 전달했고, 이를 믿은 조정은 도원수 권율을 통해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왜군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 2020. 3. 23. 이순신장군 임진왜란 그리고 백의종군 조선 14대 왕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통신사로 파견된 황윤길의 상소를 무시하고 김성일의 상소를 채택한다. 일본은 전쟁을 일으킬 의사가 없다고 판단을 한다. 이 판단의 근거는 누구도 전쟁준비를 시작해서 생길 문제들에 대한 비난을 피하려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조선에서 유일하게 전쟁 준비를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1589년(선조 22) 이산해(李山海)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나서게 된 이순신은 감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조방장(助防將)과 선전관(宣傳官) 등을 거쳐 정읍현감이 되었으며, 1591년(선조 24)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全羅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영(全羅左水.. 2020. 3. 23. 예종실록 은 조선왕조 제8대 왕 예종의 재위기간은 1468년 9월에서 1469년 11월 약 1년 3개월간의 역사를 기술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이며, 모두 8권 3책으로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 151호로 지정 되었다. 의 말미에는 "성화 6년 경인 2년에 명령을 받아 사초를ㄹ 출고하여 7년 12월에 이르러 의 편찬을 끝내고, 편찬하기 시작하여 8년 임진 5월에 끝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은 예종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성화 6년, 즉 성종 원년인 1470년 2월에 춘추관에서 편찬하라는 왕명을 받아 성종 2년인 1471년 12월 의 편찬을 마친 뒤에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3년인 1472년 5월에 완성하였다. 시호는 양도, 존호는 흠무성무의인소효, 묘호는 예종이며, 능호는 창.. 2020. 3. 22. 이순신 32세 무관에 합격, 47세 전라도좌도 수군군절도사가 되다. 이순신장군하면 여러가지가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나라를 사랑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그리고 전장에서 승리를 이끌며 죽어간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충무공 이순신이라 불리는 한 남자를 파란만장한 삶을 떠올린다. 이순신의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45년(인종 1)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漢城府) 건천동(乾川洞, 현재 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와의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보성군수 등을 지낸 방진(方震)의 딸인 상주 방씨(尙州方氏)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며, 이 밖에 해주 오씨(海州 吳氏)와의 사이에 2남 2녀가 있었다. 이순신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 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조인 .. 2020. 3. 22. 선조 , 사림의 시대와 동인의 김효원 선조의 즉위 후 사림의 시대가 왔다. 그러나 사림은 학문적, 정치적 입장이 달라지며 다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된다. 동인과 서인은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으로 인해 붕당의 시작이 도래하게 된다. 이때 동인의 우두머리가 김효원이라 할 수 있다. 동인이라 함은 사는 지역이 동쪽이여서 동인이라 불리게 되는 것이다. 김효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菴),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조부는 전생서직장(典牲署 直長) 김덕유(金德裕), 부친은 영유현령(永柔縣令) 김홍우(金弘遇)이다. 모친은 윤은좌(尹殷佐)의 딸이다. 조식(曺植) ·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신진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문명이 높았고, 김안경(金安慶) · 최인기(崔仁起) · 정유성(鄭惟誠) · 김안복(金安福) 등.. 2020. 3. 22. 선조시대 사림의 시대와 서인의 심의겸 선조의 재위 시기에는 참 많은 사건이 있다. 그중에서도 정칮거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 발생하이, 이는 바로 사림의 시대가 시작된 것과 붕당의 발생이였다. 제13대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사림들이 다시 중앙으로 재기하는 데 성고한다. 그리고 이황, 조식, 성혼, 이이를 중심으로 학파가 결성되어 학문이 더욱더 바렂하게 된다. 하지만 정치적 논쟁은 심화된다. 그리고 얼마후 사림 세력은 둘로 나뉘게 된다. 서로 학문적, 정치거 입장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사림파들은 맨 처음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된다. 이때 서인의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이 심의겸이다. 심의겸은 1535(중종 30)∼1587(선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 2020. 3. 22. 이전 1 ··· 59 60 61 62 63 64 65 ··· 7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