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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장자, 양평대군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형이다.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폐위되고, 그 뒤 전국을 누비며 풍류를 즐겼다. 시, 서에 능하였다. 이름은 이제(李禔). 자는 후백(厚伯). 태종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 민제(閔霽)의 딸이며, 부인은 광주 김씨(光州金氏)로 김한로(金漢老)의 딸이다. 1394년(태조 3)에 태어났을 때 아버지 이방원(李芳遠)은 정안대군(靖安大君)이었지만, 6년 뒤 조선의 제3대 국왕으로 등극했다. 양녕대군에게 이런 변화는 수많은 왕자군(王子君)에서 독존의 지위를 예약하는 엄청난 행운의 도래였다. 기록되지 않은 사소한 실행(失行) 은 분명히 있었겠지만, 적어도 공식적으로 양녕대군은 이때부터 20세 무렵까지 매우 순조로운 성장과정을 거쳤다. .. 2020. 3. 26.
태종의 외척이자 공신, 민무구, 민무질 비극 민무구는 1410(태종 10)년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민적(閔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변(閔忭)이고, 아버지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민제(閔霽)이며, 어머니는 송선(宋璿)의 딸이다.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이다. 동생 민무질(閔無疾) 등과 함께 태종의 외척이며, 정사(定社)·좌명(佐命)의 두 공신을 겸하여 높은 권세와 부귀를 누렸다. 그러나 협유 집권(挾幼執權)의 혐의를 받아 많은 관련자와 함께 참화를 당하였다. 즉, 1402년 왕이 창종(瘡腫)을 앓아 고생하고 있을 때 그들이 몰래 병세를 엿보며 어린 세자를 세우고 권력을 잡으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민무구 형제의 옥은 1407년(태종 7) 7월에 발생하였다. 그런데 이미 1406년 8월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 2020. 3. 26.
태종 관련 인물 - 심온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세종의 장인이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고, 1392년 조선이 개국한 뒤 병조·공조의 의랑을 지내고, 정종 때 대호군, 1411년 풍해도관찰사, 대사헌, 1414년 형조, 호조 판서, 한성부판윤, 이조판서를 지냈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옥(仲玉), 시호는 안효(安孝)이다. 세종의 장인이다. 조선 개국공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낭장 문필대(門必大)의 딸이다. 1408년 딸이 충녕군(忠寧君)의 비가 되어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은 후 벼슬이 높아졌으며, 부인도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이 되었다 1385년(우왕 11) 사마시에서 생원 합격,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조선 창업에 참여, 간.. 2020. 3. 26.
태조시대 문신 - 이숙번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안산군지사 때 방원을 도와 제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웠다. 박포, 조사의 반란을 진압했다. 병조판서,좌참찬·찬성 등을 지내고 안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공이 큰 것에 자만, 탄핵 받아 유배되었다.《용비어천가》편찬에 참여했다. 아버지는 이경이고 어머니는 영양남씨로 남휘주의 딸이다. 본래 윤공의 부인이었던 어머니 남씨는 남편 사후 두 아들 윤자량과 윤자당을 데리고 이경에게 개가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지략이 있었으며, 기억력이 비상했다 한다. 본관 안성(安城). 아버지는 경(坰). 1393년(태조 2) 문과에 급제했다. 1398년 안산군지사(安山郡知事)로 있을 때 방원(芳遠:뒤에 태종)을 도와 경복궁에 병력을 출동시켜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심효생(沈孝生) 등을 제거하.. 2020. 3. 25.
태조, 하륜를 만나다 고려 말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조선 초 이방원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였고 왕권강화의 기틀을 다지는 데 공헌하였다. 이첨과 함께《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수하였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하공진(河珙辰)의 후예로, 하식(河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식목녹사(拭目錄事) 하시원(河恃源)이고, 아버지는 순흥부사 하윤린(河允潾)이다. 어머니는 증찬성사 강승유(姜承裕)의 딸이다. 1360년(공민왕 9)에 국자감시(國子監試), 1365년에는 문과에 각각 합격하였다. 이인복(李仁復)·이색(李穡)의 제자로, 1367년에 춘추관검열·공봉(供奉)을 거쳐,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으나 신돈(辛旽)의 문객인 양전부사(量田副使)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고공좌랑(考功佐郎).. 2020. 3. 25.
태조의 책사, 정몽주 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이다.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단심가〉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본관은 영일(迎日). 출생지는 영천(永川). 초명은 정몽란(鄭夢蘭) 또는 정몽룡(鄭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정몽란이라 했다. 뒤에 정몽룡으로 개명하였고 성인이 되자 다시 정몽주라 고쳤다.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 일명 국자감시로 진사를 뽑던 시.. 2020. 3. 25.
태조의 라이벌, 최영 장군 최영은고려의 명장, 충신이다. 1359년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물리쳤다. 1361년에도 홍건적이 창궐하여 개경까지 점령하자 이를 격퇴하여 전리판서에 올랐다. 이후에도 흥왕사의 변, 제주 목호의 난을 진압했으며, 1376년에는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자 홍산에서 적을 대파했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려하자,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출정을 명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되었다. 본관 동주(東州). 시호 무민(武愍).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수차 왜구를 토벌, 우달치[于達赤:司門人]가 되었으며,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고 호군(護軍)에 올랐다. 1354년 대호군(大護軍) 때 원(元)나라의 요청으로 중국에서 장사성(張士誠)의 .. 2020. 3. 25.
광해군, 개혁과 중립외교를 펼치다 임진왜란이 한참 일어나고 있는 시기 14대 임금 선조는 의주로 도망을 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영변(寧邊)에서 갈라졌다. 선조는 의주로 향하고 광해군은 권섭국사(權攝國事)의 직위를 맡아 분조(分朝)의 책임자로 평안도 지역으로 출발하였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을 수복한 후 무군사(撫軍司)의 업무를 담당하여 수도 방위에도 힘을 기울였다. ;1597년 정유재란(임진왜란 중 왜군의 2차 침략을 따로 부르는 말)이 일어났을 때는 전라·경상도로 내려가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 2020. 3. 24.
조선 15대 왕 광해군 - 이혼 조선 15대 왕 광해군은 1575년에 태어나 1641년에 사망했다. 재위기간은 1608년에서 1623년으로 15년 1개월이다. 조선의 제 14대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서 선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조는 당시 왕비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고, 후궁 공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장남 임해군과 차남 광해군을 두었다. 그런데 임해군은 성품이 포악해 광해군이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서야 세자초 책봉된 광해군은 전장을 누비며 저재으이 총사령관 역활을 충실히 하며 백성들을 위로한다. 전쟁 이후, 아버지 선조와 새 왕비 인목왕후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왕위 세습의 위협을 받지만, 얼마 되지 않아 선조가 승하하면서 조선의 제 15대 왕으로 즉위한다.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되기전 세자 .. 2020. 3.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