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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오리 이원익, 대동법을 완성하다

by 무님 2020.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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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은 조선시대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의 생몰년은 그를 규정하는 대표적 특징을 알려준다. 그는 87세로 매우 장수했고, 그런 까닭에 임진왜란(45세, 이조판서)과 인조 반정(76세, 영의정), 정묘호란(80세, 영중추부사) 같은 조선 중기의 중요한 사건을 모두 통과했다. 나이와 관직이 보여주듯이 그는 그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다. 어떤 사람의 지위와 임무가 높고 중요할수록 그의 일상은 평온보다는 변화와 격동에 지배되기 쉽다. 그 사람의 성향에 따라 그것은 그에게 행복이기도 하고 고통이기도 할 것이다. 조선 중기는 뛰어난 인물들이 특히 많이 배출된 시기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조건은 특히 가혹했다. 이원익은 뛰어난 실무적 경륜과 굳은 의지로 그런 국면을 헤쳐간 중요한 인물이었다.

 

오리 이원익

 

본관은 전주(). 자는 공려(), 호는 오리(). 한성부 출신. 태종의 아들 익녕군() 이치(+)의 4세손이며, 수천군() 이정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청기수() 이표()이다. 아버지는 함천성() 이억재()이며, 어머니는 감찰 정치()의 딸이다. 강서()·조충남() 등과 교유하였다. 키가 작아 키작은 재상으로 널리 불렸다.

 

15세에 동학(: 4학 중의 하나)에 들어가 수학해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이듬해 승문원권지부정자로 활동하였다.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한다. 유성룡()이 일찍부터 이원익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정자·저작 겸봉상직장을 거쳐 1573년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 그 해 2월 성절사 권덕여(輿)의 질정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그 뒤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이듬 해 가을 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 병적()을 정비하면서 실력을 발휘, 특히 이이()에게 인정되어 여러 차례 중앙관으로 천거되었다.

1575년 가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온 뒤, 지평·헌납·장령·수찬·교리·경연강독관·응교·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 우부승지 때 도승지 박근원()과 영의정 박순()의 사이가 좋지 않자 왕자사부 하락()이 승정원을 탄핵하였다.

다른 승지들은 도승지와 영의정의 불화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화를 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동료를 희생시키고 자신만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상주해 파면되어 5년간 야인으로 있었다.

그 뒤 1587년 이조참판 권극례()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어, 양곡 1만여 석을 청해 기민을 구호하고 종곡()을 나누어주어 생업을 안정시켰다. 또, 병졸들의 훈련 근무도 연 4차 입번()하던 제도를 6번제로 고쳐 시행하였다.

이는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것을 1년에 2개월씩으로 고쳐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킨 것이다. 이 6번 입번제도는 그 뒤 순찰사 윤두수()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졌다.

그리고 뽕을 심어 누에 칠 줄을 몰랐던 안주 지방에 이원익이 권장해 심어 백성들로부터 이공상(: 이원익에 의해 계발된 이라는 뜻)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한다.

그 뒤 임진왜란 전까지 형조참판·대사헌·호조와 예조판서·이조판서 겸 도총관·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먼저 평안도로 향했고, 선조도 평양으로 파천했으나 평양마저 위태롭자 영변으로 옮겼다.

이 때 평양 수비군이 겨우 3,000여 명으로서, 당시 총사령관 김명원()의 군통솔이 잘 안되고 군기가 문란함을 보고, 먼저 당하에 내려가 김명원을 원수()의 예로 대해 군의 질서를 확립하였다.

평양이 함락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왜병 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정월이여송()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한 공로로 숭정대부()에 가자되었고, 선조가 환도한 뒤에도 평양에 남아서 군병을 관리하였다. 1595년 우의정 겸 4도체찰사로 임명되었으나, 주로 영남체찰사영에서 일하였다.

이 때 명나라의 정응태()가 경리() 양호()를 중상모략한 사건이 발생해 조정에서 명나라에 보낼 진주변무사(使)를 인선하자, 당시 영의정 유성룡에게 “내 비록 노쇠했으나 아직도 갈 수는 있다. 다만 학식이나 언변은 기대하지 말라.” 하고 자원하였다. 그러나 정응태의 방해로 소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선조로부터 많은 위로와 칭찬을 받고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이첨() 일당이 유성룡을 공격해 정도()를 지켜온 인물들이 내몰림을 당하자 상소하고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 뒤 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그 해 9월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이 때 정영국()과 채겸길()이 홍여순()·임국로()를 두둔하면서 조정 대신을 공격하자 당파의 폐해로 여기고 이의 근절을 요구했고, 또 선조의 양위(: 임금이 왕위를 다음 임금이 될 사람에게 물려줌)를 극력 반대하고 영상직을 물러났다.

1600년 다시 좌의정을 거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영남 지방과 서북 지방을 순무하고 돌아왔다. 1604년 호성공신()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에 봉해졌다.

광해군 즉위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을 때 전쟁 복구와 민생 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호조참의 한백겸()이 건의한 대동법()을 경기도지방에 한해 실시해 토지 1결()당 16두()의 쌀을 공세()로 바치도록 하였다.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비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여색에 대한 근신, 국가 재정의 절검 등을 극언으로 간쟁했고, 임해군()의 처형에 극력 반대하다 실현되지 못하자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정조()·윤인() 등이 대비폐위론을 주장하자,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극렬한 어구로 상소해 홍천으로 유배되었으며 뒤에 여주로 이배되었다.

1623년(인조 1)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제일 먼저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다.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인조에게 자신이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니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설복해 광해군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도체찰사로 세자를 호위해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했으며, 서울로 환도하자 훈련도감제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고령으로 체력이 약해져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성품이 소박하고 단조로워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집은 두어 칸 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했다 한다. 인조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았다.

이원익은 1634년 1월 29일 금촌에서 세상을 떠났고, 4월 그곳에 묻혔다. 영예와 고난이 교차한 87세의 긴 생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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