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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광해군 - 인목대비 폐하다

by 무님 2020.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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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14대 선조의 왕비. 계비이다.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 생모이다. 그러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폐위되는 불운에 처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다시 인조반정으로 명예를 회복한 대비는 바로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를 지칭하는 말이다. 19세의 나이로 51세의 선조에게 시집을 와서 선조가 그토록 바랐던 아들 영창대군을 낳았지만, 영창대군은 그녀에게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안겨주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인목왕후어필 칠언시

 

인목왕후의 본관은 연안()이며 김제남()의 딸로, 1584년(선조 17)에 태어나 1602년(선조 35) 선조의 계비()가 되었다. 당시 인목왕후의 나이는 19세, 선조의 나이는 51세로, 당시까지는 가장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왕과 계비였다. 선조는 의인왕후 사망 후 3년 뒤에 곤위(: 왕후의 지위)를 정한다는 선례를 따르면서도, 미리 금혼령()을 내리고 처녀단자()를 올리게 하여 14세 이상의 처자들 중에서 간택을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계비를 주로 후궁 중에서 승진시키는 방식으로 뽑았지만, 선조는 중종이 문정왕후(, 1501~1565)를 외부에서 간택한 전례를 따라서 계비를 외부에서 간택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당시 선조의 총애를 받았던 인빈 김씨( )는 후궁에서 왕비로 승진될 수 있는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1602년(선조 35) 선조는 이조좌랑 김제남()의 딸을 최종적으로 간택하였고, 이어서 중종이 시행했던 전례대로 친영() 의식이 거행되었다. 친영은 별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고 있던 왕비를 친히 맞이하여 궁궐로 모셔오는 의식으로, 요즈음의 결혼식에 해당된다. 선조는 중종대에 친영을 행한 것이 바른 예의를 행한 것이라 평가하고, 친영의 예에 의거하여 인목왕후를 왕비로 맞이하고자 했다. 이때 각종 의물()들이 호화롭게 준비되고, 친영을 위한 도로 공사 중에 죽고 다친 자가 10여 명이나 발생하는 등 혼례식 준비에 많은 공력과 희생이 있었다. 마침내 선조는 별궁 태평관에서 왕비 수업을 받고 있던 인목왕후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인목왕후는 궁궐에 들어온 후 선조의 기대대로 출산에 성공했다. 1603년(선조 36)에는 정명공주()를, 1606년(선조 39)에는 영창대군을 낳았는데, 특히 선조는 55세라는 늦은 나이에 적장자()를 얻게 된 사실에 크게 고무되었다. 그러나 이는 후궁인 공빈 김씨 소생의 광해군이 세자로 있던 상황에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정치적 대립이 야기될 것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왕비인 인목왕후에게서 태어난 적장자 영창대군이 광해군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했기 때문이었다. 인목왕후의 측근 내인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계축일기()]에는 이러한 정황이 포착되어 서술되어 있다.

유자신(柳自新: 광해군의 장인)과 동궁의 무리들은 대군(영창대군)이 탄생하시자마자 눈엣가시와 의붓자식처럼 생각하고 어떻게든 처치할 마음을 먹었다. 그들은 대군께서 무럭무럭 자라나자 큰 변을 일으켜 단숨에 없애버리기 위해 날마다 모의하였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대군을 불쌍히 생각하지 않고, 그저 모든 일에 꼬투리를 잡아 시비하고 매우 박대하였다. [계축일기] 1

 

영창대군의 탄생을 계기로 북인은 두 개의 당파로 나뉘어졌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이 그것이다. 그리고 각각 대북의 중심에는 정인홍(, 1535~1623)이, 소북의 중심에는 유영경(, 1550~1608)이 자리를 잡았다. 선조가 소북의 영수 유영경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면서, 영창대군은 차기 대권주자로 급부상하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승하하면서, 정국은 일시에 변하였다. 선조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직 어린 영창대군 대신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었던 광해군을 국왕의 자리에 올릴 것을 유언으로 남겼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이 16년간의 위태했던 세자 생활에서 벗어나 왕위에 오르면서,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존재가 되었다

 

1608년 광해군 정권이 들어서면서 영창대군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유영경은 처형되었고,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소북 인사들이 대거 축출되었다. 반대 세력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였지만, 광해군은 불안감을 쉽게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점차 성장하고 있는 영창대군의 존재는 실로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긴장감이 흐르는 정국 속에서, 이에 더욱 기름을 붓는 사건이 발생했다. 1613년(광해군 5) ‘은상() 살해 사건’이 그것이다

 

역모 사건의 죄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영창대군에게 돌려지면서, 김제남은 처형되었고 7세의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영창대군은 광해군의 지시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밀실에 가두어져 아궁이에 불을 지펴 죽임을 당하는 증살()로 숨을 거두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 정권기 왕실의 최고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경운궁에서 핍박을 당하며 그렇게 모진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10여 년 가량 경운궁에서 힘든 나날을 살고 있었던 인목대비에게 한줄기 빛이 비춰졌다. 1623년에 광해군을 몰아내고 서인 정권이 들어서는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1623년 3월 13일 삼경(밤 11시~새벽 1시) 무렵, 광해군 시절 북인들에 의해 권력에서 소외당했던 자들이 결집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 인조)을 추대하는 반정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서인(西) 세력이 주도한 반정은 성공했다. 반정 성공 후 서인은 서궁(西)에 유폐되어 있던 왕실 어른인 인목대비를 창덕궁으로 모셔오고자 했다. 반정의 명분으로 제시했던 ‘폐모살제(: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임)’의 주인공 인목대비에게 반정을 공식적으로 승인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인목대비는 인조의 광해군에 대한 복수가 곧, 자신에 대한 효()를 행하는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신하들은 뜻밖의 변란이 있을까 걱정하여, 어보가 전달된 다음 즉위식을 곧바로 진행하고자 하였다. 이에 인목대비는 “별당은 선왕께서 일을 보시던 곳이라 이미 궁인으로 하여금 청소를 하게 하였다”하며 별당에서 즉위하게 하였다. 이곳은 즉조당()으로, “인조가 계해년에 이 궁에서 즉위하였으므로 즉조당()이 있다”라는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왕으로 즉위한 인조는 일을 보며 밤을 새웠고, 신하들은 칼을 차고 숙위하였다. 다음날, 인목대비는 즉위 교서를 내려 반정의 정당성을 공표하였다. 그 앞부분에는 광해군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이와 함께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를 열거하였다. 그 첫째로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자신을 서궁에 유폐한 ‘폐모살제()’를 들었다. 이것은 성리학의 이념을 신념화한 서인들에게 주요한 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이어서 광해군대에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중립외교를 한 것과 무리한 토목 공사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것 등을 광해군의 악행으로 열거하였다.

인조반정은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광해군은 왕위를 박탈당한 채 강화도 교동도로 유배되었고, 인목대비는 다시 왕실 최고 어른으로 복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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