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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광해군시대 사건 - 회퇴변척

by 무님 2020.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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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퇴변척은 1611년(광해군 3) 3월 정인홍이 무함을 받은 스승 조식의 변호를 위해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하며 배척한 일이다. 1611년(광해군 3) 3월에 우찬성 정인홍()이 스승 조식()이 퇴계(退) 이황()으로부터 무함 받은 것을 변호한다는 구실로 차자()를 올려 이황을 비판하고 아울러 회재() 이언적()의 과오까지 지적하였다. 이에 이목() 등 500여 명의 유생이 단체로 소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을 옹호하면서 정인홍의 ‘회퇴변척’을 공격하고, 그의 이름을 성균관의 유적(, 청금록)에서 삭제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유생들을 처벌하려 하자, 그들은 성균관을 나가 권당()에 들어가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이후 관료들과 지방 유생들까지 양측으로 나뉘어 몇 달이나 시비 논쟁을 벌이게 되어 정국이 큰 혼돈에 빠지게 되었다

 

이황과 조식은 같은 해에 태어나고 같은 해에 작고한 영남의 학자로서 생전에 교유하지 않았으나, 서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조식은 이황이 격식에 매인 학자로 보았고, 이황은 조식이 산림에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는 것을 오만하며 세상을 경멸하는 태도로 보았고, 중도()에 맞지 않으며 노장()의 풍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1610년(광해군 2) 7월에 유생들의 운동으로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오현()이 문묘에 종사되었다. 정인홍은 스승 조식()이 여기에 포함되지 못한 것은 이황의 비판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1611년 3월에 정인홍은 차자를 올려 조식에 대한 이황의 비판을 조목조목 설파 해명하고, 아울러 회재와 퇴계의 과오를 비판하였다. 그는 을사사화() 때 이언적과 이황이 고관으로 벼슬하면서 이를 막지 못한 것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이황이 만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나오지 않은 것을 또 하나의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 행실로 비판하였다. 또한 퇴계가 조식과 성운을 노장의 풍으로 비판하였지만, 퇴계 자신도 노장을 본받는다고 힐난하였다. 그는 1543년(중종 38) ‘작서()의 변’에 연루되어 죽은 왕자 복성군()의 죽음에 회재와 퇴계가 책임이 있는 것처럼 지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이언적과 이황이 이미 문묘에 배향된 후였기 때문에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오히려 유림으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게 되었다. 성균관 유생 이목() 등 500여 명이 단체로 소를 올려 정인홍의 ‘회퇴변척’을 공격하고, 그의 이름을 성균관의 유적에서 삭제해 버렸다. 또 승지 김상헌()과 응교 이준() 등은 정인홍을 비판하였고, 지평 박여량() 등은 정인홍을 옹호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유적 삭제의 책임자를 색출하게 하자 유생들은 성균관을 나가 권당()에 들어갔다. 결국 좌의정 이항복() 등이 만류하여 광해군은 유생들을 타일러 용서하였다. 그 후에도 조정의 관료들과 지방 유생들까지 시비 논쟁에 가담하여 몇 달이나 지속하였다가 그해 8월에 그쳤다.

 

정인홍은 ‘회퇴변척’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고 유림에서 배척되었다. 유생들은 500여 명이 단체로 상소하여 이언적과 이황을 옹호하였고, 정인홍의 이름을 청금록에서 지웠으나, 처벌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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