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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님의 여행 이야기

산행을 가다 만난 절 < 용문사 >

by 무님 2020.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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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용문산에 있는 신라시대에 세워진 사찰이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하였다고 합니다. 고려 우왕 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습니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습니다. 성종 11년(1480)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1893) 봉성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 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습니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 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 등을 중건하였으며,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관음전, 지장전, 미소전(오백나한전), 산령각, 칠성각, 요사채, 일주문, 템플스테이 수련관,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습니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비와 보물 제1790호 로 지정된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30호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양평 용문사

 

 

용문사는 용문산 아래 위치해 있다. 신라 시대에 창건 되었다는 오랜 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절집 자체에서는 고찰의 분위기를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용문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앉아 있어 절에 들어 서면 감탄을 절로 나온다. 

용문사는 주창에 차를 세우면서부터 북적인다. 서울 인근에 위치해 있는 데다가 교통편도 잘 되어 있고 용문산 산행을 하기 위해 오는 등산객도 많아 관광지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주차장을 나와 걷기 시작하면 음식점과 노점상이 줄 비해 있어 걷는 길이 좋지많은 않다. 그러나 용문사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는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걷는 길의 즐거움을 돌려준다.

 

 

 

용문사의 사천왕문을 지나 대웅전 길로 올라가면 1000년이 넘는 세월을 가진 은행나무가 있다. 긴 세월을  살아온 은행나무의 웅장함과 노련함이 느껴지는 나무이다. 가을 노란 물을 들인 은행나무의 모습은 사람들의 발길을 절로 멈추게 만든다. 용문사는 고찰이라고 하기엔 모든 건물들이 새것 새것 한 느낌이다. 용문사의 가장 큰 절집인 대웅전조차 오랜 멋스러움보다는 잘 꾸며놓은 새색시 마냥 예쁘기만 하다.

 

 

용문사 관음전에는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있는데 용문사에 몇 가지 보물 중 하나가 있다. 조선 초기에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그 모습이 화려하면서도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어 자꾸 눈길을 머물게 한다.

또한 용문사에는 정지국사탑 및 비는 조선 전기에 건립된 승려 정지국사 지천의 승탑과 탑비이다.

보물 제531호. 승탑의 높이는 2.15m이고, 탑비 몸돌의 높이는 1.10m이며, 너비와 두께는 각각 0.6m와 0.2m이다. 고려 말∼조선 초에 활동하였던 정지국사 지천(智泉)의 유골을 봉안한 승탑과 그의 행적과 업적 등을 기록한 탑비로, 1398년(태조 7)에 건립되었다. 용문사 은행나무의 오른쪽 산 능선에 있으며, 탑비는 승탑에서 80m 정도 떨어진 아래쪽에 있다.

승탑은 문인 조안(祖眼) 등이 주관하여 세웠는데,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여러 장의 길고 큰 돌로 조립한 탑구(塔區)의 가운데에 서 있다. 바닥돌과 아래 받침돌은 네모나지만, 윗 받침돌과 몸돌은 단면이 8각이어서, 우리나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 원당형(圓堂形)을 계승하였다.

바닥돌은 길고 큰 널돌을 넓게 결구(結構)하여 마련하였는데, 그 위에는 하나의 돌로 조성한 아래 받침돌이 놓여 있다. 아래 받침돌의 옆면에는 하나의 꽃잎[單葉]이 아래로 향한 복련(覆蓮)의 연꽃무늬가 각 모서리마다 1개씩, 각 변에는 5개씩 모두 24개가 새겨져 있다. 윗면의 가운데에는 네모난 2단의 낮고 높직한 굄과 함께 둥글고 낮은 1단의 굄이 마련되어 있다. 가운데 받침돌은 마치 북을 엎어 놓은 것처럼 위아래의 너비가 좁고 가운데의 너비는 넓은 모습인데, 겉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이 부드러운 곡선을 보일 뿐이다. 윗 받침돌은 밑면에 3단의 각진 받침이 있고, 옆면에는 하나의 꽃잎이 위로 솟아 있는 앙련(仰蓮)의 연꽃무늬 16개가 장식되어 있다.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서 각진 1단의 굄을 새겼다.

몸돌은 위아래 부분에 덮개돌 모양과 굽 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의 좌우에는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어 있다. 1면에만 문비(門扉)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퇴화된 양식이다. 지붕돌은 몸돌 바로 윗부분에 3단의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낮은 부연(副椽)이 조각되었으며, 각 모서리마다 각진 서까래를 두었다. 윗면인 낙수면에는 내림마루인 우동(隅棟)이 크게 두드러져 표현되었으며, 각 모서리의 전각(轉角)에는 퇴화된 귀꽃무늬가 장식되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는 완전하지 않아서, 현재는 앙련을 새긴 돌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탑비는 무덤 앞에 세우는 작은 비석인 갈석(碣石)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규모이다. 윗부분은 모서리가 양쪽 모두 접힌 모습이고, 글자를 새긴 주위인 위아래와 좌우의 테두리에는 가는 선이 처져 있다. 비명은 당시에 활동하였던 권근(權近)이 지었는데, 몸돌의 앞면에 각 행마다 44자씩 모두 20행으로 새겨져 있다. 비액(碑額)은 소전(小篆)으로, 지름 4㎝ 정도의 크기이며, 비명은 지름 1.5㎝ 안팎의 해서체인 소해(小楷)로 쓰여 있다. 다만, 서형태미(書形態美)로는 소해이지만, 당시 유행하였던 당해(唐楷)의 범주에 속하는 서체이다. 몸돌의 옆면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고, 뒷면의 비음(碑陰)에는 당시의 찬조자 명단이 6단 21행으로 적혀 있다.

이 탑비는 바위 위에 있는데, 아랫부분의 왼쪽이 약간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양호한 상태이다. 깔끔한 필치와 정갈한 구성이 돋보인다.

 

 

 

 

용문사는 템플스테이가 잘 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도시와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하다. 템플스테이의 프로그램도 여러 가지로 잘 되어있고 체험거리도 다양하며 시설도 깨끗하여 외국인들에게도 좋은 평을 받는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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