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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선조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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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두수 - 조선시대 대사헌,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해평(). 자는 자앙(), 호는 오음(). 윤계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희림()이다. 아버지는 군자감정 윤변()이며, 어머니는 부사직() 현윤명()의 딸이다. 윤근수()의 형이다. 이중호()·이황()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간 다음, 검열()·정자()·저작()을 역임하였다.

1563년 이조정랑에 재임 중 권신() 이량()이 아들 이정빈()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박소립()·기대승() 등과 함께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대사헌 이감()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영의정 윤원형(), 우의정 심통원()의 계문(: 왕에게 일정한 양식을 갖추어 올리는 양식의 글)으로 무죄임이 밝혀져 수찬에 다시 서용()되었다.

그 뒤 이조정랑·의정부검상·사인·사헌부장령·성균관사성·사복시정() 등을 지내고, 1565년 문정왕후()의 천거로 부응교에 임용된 뒤 동부승지·우승지를 거쳐 1576년(선조 9)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듬해 사은사(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도승지가 되었으나, 이종동생 이수()의 옥사에 연좌, 아우 윤근수와 함께 파직되었다. 대사간 김계휘()의 주청으로 복직되어 연안부사로 나갔다. 1581년 황해감사의 서장()에 의해 재령군수 최립() 등과 함께 구황()을 잘했다 하여 옷 한 벌이 하사되었다.

이후 한성좌윤·오위부총관·형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587년 왜구가 전라도 지방을 침범해 지역 인심이 흉흉해지자,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해 수사·수령의 기강 쇄신과 범죄자 처벌에 노력하였다.

1589년 평안감사를 지내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종계(: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를 변무(: 잘못된 것을 바로 잡도록 함)한 공으로 광국공신() 2등이 되어 해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대사헌·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591년 5월 석강()에서 도요토미[]의 답서를 명나라에 알려 진상을 보고할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 병조판서 황정욱()과 함께 보고할 것을 주장하다가 양사의 합계()로 정철()에게 당부()했다 하여 파면되었다.

그리고 건저문제(: 세자 책봉의 문제)로 정철이 화를 당할 때 같은 서인으로 연루되어 회령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 뒤 윤두수의 견해가 타당성이 있음을 안 선조는 공을 인정하는 뜻에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다시 기용되어, 어영대장·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해 평양 행재소()에 임진강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는 주장에 반대하고 우리의 힘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해 이조판서 이원익(), 도원수 김명원() 등과 함께 평양성을 지켰다. 이듬해 삼도체찰사(使)를 겸했으며, 1595년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해원부원군()에 봉해졌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난국을 수습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올랐으나, 대간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사직하고 남파()에 물러났다. 1605년 호성공신() 2등에 봉해졌다.

평소 온화하고 화평했으나, 큰 일을 당했을 때에는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정유재란의 국가적 위기 때에는 적극적으로 극복에 나섰다. 저서로는 『오음유고』·『기자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이다.

 

 

 

2. 이발 - 1544(중종 39)∼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경함(), 호는 동암()·북산(). 이달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공인()이다. 아버지는 제학 이중호()이며, 어머니는 윤구()의 딸이다. 김근공()·민순()의 문인이다.

1568년(선조 1) 생원이 되고, 1573년(선조 6) 알성문과에 장원, 이듬해 사가독서()를 하고, 이조정랑으로 발탁되었다. 1579년 응교, 1581년 전한, 1583년 부제학을 역임하고 이듬해에 대사간에 이르렀다.

홍가신()·허당()·박의()·윤기신()·김영일()·김우옹() 등과 교유하였으며, 특히 최영경()과 가장 친하였다. 조광조()의 지치주의()를 이념으로 삼아 사론()을 주도, 경연()에 출입하면서 왕도정치를 제창하여 기강을 학립하고 시비를 분명히 가렸다.

또, 이조전랑으로 있을 때에는 자파의 인물을 등용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샀으며, 동인의 거두로서 정철()의 처벌문제에 강경파를 영도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이()·성혼() 등과도 교분이 점점 멀어져 서인의 미움을 받았다.

1589년 동인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남을 계기로 서인들이 집권하게 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교외에서 대죄()하던 중 잡혀 두 차례 모진 고문을 받고 장살()되었다.

이발이 죽은 뒤 82세의 노모와 8세의 아들도 엄형()으로 죽었는데, 노모는 형벌이 너무 지나치다고 꾸짖으면서 끝내 역모에 관한 일을 승복하지 않았으며, 문생·노비도 모두 엄형을 가하였으나 승복하는 자가 없었다.

 

 

3. 이산겸 - 조선시대 홍문관정자, 사헌부집의,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한산(). 자는 여수(), 호는 아계()·종남수옹(). 이장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치()이다. 아버지는 내자시정() 이지번()이며, 어머니는 남수()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이듬 해 홍문관정자가 되어 명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대액()을 썼다. 이어 부수찬이 되고 1564년 병조좌랑·수찬, 이듬 해 정언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원접사종사관(使)으로 명나라 조사(使)를 맞이한 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헌부집의·상의원정()·부교리를 역임하고, 직제학이 되어 지제교를 겸하였다. 이어 교리·응교를 지내고 사가독서(: 문흥을 위해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마친 뒤, 1570년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1577년 이조·예조·형조·공조의 참의를 차례로 지내고 대사성·도승지가 되었다.

1578년 대사간이 되어 서인 윤두수()·윤근수()·윤현() 등을 탄핵해 파직시켰다. 다음 해 대사헌으로 승진하고 1580년 병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듬 해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오르고, 다시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제학·대제학·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를 겸하였다.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 무렵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다음 해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며, 종계변무(: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이임인()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도록 요청한 일)의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아성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이듬 해 정철()이 건저(: 세자 책봉) 문제를 일으키자 아들 이경전()을 시켜 김공량(: 의 오빠)에게 정철이 인빈과 신성군()을 해치려 한다는 말을 전해 물의를 빚었으며, 아들로 하여금 정철을 탄핵시켜 강계로 유배시켰다. 한편 이와 관련해 호조판서 윤두수, 우찬성 윤근수와 백유성()·유공진()·이춘영()·황혁() 등 서인의 영수급을 파직 또는 귀양보내고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해 개성에 이르렀으나,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했다는 양사(: 사간원·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백의()로 평양에 이르렀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평해()에 중도부처()되었다.

1595년 풀려나서 영돈녕부사로 복직되고 대제학을 겸하였다. 북인이 다시 분당 때 이이첨()·정인홍()·홍여순() 등과 대북파가 되어 영수로서 1599년 재차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 해 파직되었다가 1601년 부원군()으로 환배(: 복직되어 제수됨)되었으며, 선조가 죽자 원상()으로 국정을 맡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으며, 특히 문장에 능해 선조조 문장팔가()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한다. 서화도 잘해 대자()와 산수묵도()에 뛰어났으며, 용인의 조광조묘비()와 안강의 이언적묘비()를 썼다. 이이()·정철과 친구였으나 당파가 생긴 뒤로는 멀어졌다. 저서로 『아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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