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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선조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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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규 -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 참전한 승려이다.

승병장. 밀양박씨(). 호는 기허(). 충청남도 공주 출신. 계룡산 갑사()에 들어가 출가하고, 뒤에 휴정()의 문하에서 법을 깨우쳐 그의 제자가 되었다.

충청남도 공주청련암()에 있으면서 선장()을 가지고 무예를 익히기를 즐겼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을 통곡하고 스스로 승장이 되었다.

의승() 수백명을 규합하여 관군과 더불어 청주성의 왜적을 쳤다. 관군은 패하여 달아났으나 그가 이끄는 승병이 분전하여 마침내 8월초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이어 의병장 조헌()이 전라도로 향하는 고바야가와()의 일본군을 공격하고자 할 때, 그는 관군과의 연합작전을 위하여 이를 늦추자고 하였다.

그러나 조헌이 듣지 않자 그는 조헌을 혼자서 죽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조헌이 이끄는 의사와 영규가 거느린 승군은 1592년 8월 18일 금산전투에서 최후의 한사람까지 싸워 일본군의 호남침공을 저지하였다.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갔던 선조는 청주성 승전의 소식을 듣고, 영규에게 당상의 벼슬과 옷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영규는 임금이 내린 상사()가 도착하기 전에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승병이 일어난 것은 그가 최초로서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궐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금산의 종용사()에 제향되었으며, 뒤에 법도() 대인() 등이 금산 남쪽 진락산() 기슭에 그의 영정을 안치한 진영각()과 비를 세웠다.

 

 

영규대사

 

 

2. 원균 - 조선시대 경상우수사, 삼도수군통제사, 전라좌병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본관은 원주(). 고려 태조 때의 통합삼한공신() 병부령 원극유()의 후손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조산만호()로 있을 때 변방의 오랑캐를 무찌른 공으로 부령부사로 특진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종성으로 옮겨 병사 이일()을 따라 시전부락()을 격파하는 데도 공을 세웠으며, 1592년(선조 25)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그 해 4월 13일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양국간의 전쟁 준비 격차로 말미암아 전쟁 발발 초부터 일방적인 패주의 연속이었다. 이에 거진()의 명관들은 다투어 도주하고, 백성들은 모두 산간으로 피난해 성읍이 모두 텅 빈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수군 제일의 요충인 경상좌수영의 군사도 수사 박홍() 이하 모든 장병이 도주해 싸워보지도 못한 채 완전 궤멸되었으며, 우수영 관할의 장병들도 거의 흩어져 휘하에는 약간의 장병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조정과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흩어진 군사를 수습해 고군분투하였다.

몇 차례에 걸친 원병 요청 끝에 마침내 이순신의 원병이 도착하자 합세해 옥포()·당포() 등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그러나 포상 과정에서 이순신과의 공로 다툼이 심해 불화가 발생하였다. 급기야 1593년 8월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직에 임명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크게 반발해, 이듬해 12월 충청병사로 전출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전라좌병사로 전속되었다.

병사로 재직 중에도 여러 차례 수군 작전에 관한 계획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번 수사로 재기용할 것을 검토하던 중,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서울로 잡혀가 국문을 받게 되자, 1597년 2월에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 수군을 통제하게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이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군을 이겨야 한다는 각오 아래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중인 것도 모르고, 조정의 무리한 명령에 따라 삼도 수군을 이끌고 부산의 적을 공격하던 중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해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1604년 이순신·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책록되어,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원릉군()에 추봉되었다. 1605년 왕이 내린 치제문과 숙종 때의 대사헌 김간()이 찬한 「통제사원균증좌찬성공행장(使)」이 있다.

이순신이 민족의 영웅으로 각광을 받은 것과는 달리, 원균은 대표적인 비겁한 장수로 기록되어 오기도 한다.

 

 

3. 유정 - 조선 중기의 승려이다.

본관은 풍천()이고, 속성은 임(), 속명은 응규()이며, 자는 이환(), 호는 사명당( 또는 )·송운()·종봉(), 시호는 자통홍제존자()이다. 형조판서에 추증된 임수성()의 아들로서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 13세 때 황여헌()에게 《맹자()》를 배우다가 황악산() 직지사()의 신묵()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명종 16) 승과()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에 봉은사()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휴정(;서산대사)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석방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듬해 승군도총섭()이 되어 명()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의령()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 명나라 총병() 유정()과 의논,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와 함께 울산()의 도산()과 순천() 예교()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使)가 되었다. 1604년(선조 37)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이듬해 전란 때 잡혀간 조선인 3000여 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선조가 승하한 뒤 해인사()에 머물다가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당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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