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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선조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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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효원 - 1542(중종 37)∼1590(선조 23).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선산(). 자는 인백(), 호는 성암(). 김수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생서직장 김덕유(), 아버지는 영유현령() 김홍우(), 어머니는 윤은좌()의 딸이다. 조식()·이황()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고, 1565년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병조좌랑·정언·지평 등을 역임했다. 1573년(선조 6) 사가독서()하고, 1574년 다시 지평을 맡았다.

명종 말 문정왕후()가 죽은 뒤 척신계()의 몰락과 더불어 새로이 등용되기 시작한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1572년 오건()이 이조전랑()에 추천했으나, 사림으로 척신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이 반대하는 바람에 거부당했다.

그러나 1574년조정기()의 추천으로 결국 이조전랑이 되었다.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전랑의 관직은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고 이발()을 추천했다.

이러한 일을 계기로 심의겸과의 반목이 심해지면서, 사림계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즉, 훈신()·척신들에 의한 정치 체제의 개혁을 둘러싸고 선조 즉위 직후부터 전배()와 후배()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척신 정권 때 정계에 진출해 심의겸의 도움을 받은 사림이 전배이고, 소윤의 몰락 이후 심의겸과 무관하게 정계에 진출한 부류가 후배로, 이들 후배 사림은 심의겸의 척신적 처지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이조전랑 추천과 임명을 둘러싼 대립을 계기로 점차 심화되어,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전배는 대부분 서인이 되고,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후배는 동인이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동부의 건천동()에 있다고 해서, 그 일파를 동인이라 불렀던 것이다.

두 사람의 대립이 점차 심해지자, 우의정 노수신(), 부제학 이이() 등이 분규의 완화를 조정하고자 두 사람 모두 외직으로 내보낼 것을 건의해, 심의겸은 개성부유수로, 김효원은 경흥부사로 나갔다.

그러나 김효원을 지지하는 후배들은 축출한 것이라 반발해 다시 부령부사로 옮기게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부령이 변방이라고 반발하므로 다시 삼척부사로 옮기게 되었다. 결국 노수신과 이이의 조정은 실패했고, 선조는 당쟁의 완화를 위한 조처로 이조전랑의 추천·교대 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 사간의 물망에 올랐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아 내직에 복귀하지 못했고, 당쟁이 더욱 심해지면서 안악군수로 자청해 나갔다. 이 후 10여년 간 한직()에 머물며 당쟁이 일어난 것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시사()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후에 선조의 특명으로 영흥부사로 승진해 재직 중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삼척의 경행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성암집()』이 있다.

 

 

 

 

2. 박순 - 박순[, 1523(중종 18)~1589(선조 22)]은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화숙()이고, 호는 청하자()·사암()이며, 시호는 문충()이다. 본관은 충주()로서, 아버지는 한성부 좌윤을 지낸 우(, 1476~1547, 호는 )이고, 어머니는 당악 김씨( )이다. 기묘명현()으로서 문장가로도 알려진 박상()은 그의 백부이다. 박순의 집안은 11대조부터 관직에 나아가 대대로 호서에 살다가 이후 광주()·나주() 등으로 처향()을 따라 이주하면서 호남 사람이 되었다. 박순 역시 나주에서 태어났으나, 6세에 어머니를 잃고 이후 광주에서 서모에 의해 양육되었다.
18세에 진사가 되고 이후 개성부 유수였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서경덕()에게 나아가 수학했다. 박순은 1553년 31세에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공조좌랑·홍문관수찬 등을 지냈다. 1561년 홍문관응교로 있으면서 임백령()의 시호 문제로 윤원형()의 미움을 사서 파면되어, 5월에 나주로 돌아가 기대승()과 왕래하며 지냈다. 같은 해 12월에 다시 기용되어 한산군수가 되었고 이후 성균관사성·승정원좌승지·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65년 정월에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대사간·대사헌 등과 함께 이량()·이감()·윤백원() 등을 탄핵하였다. 4월에 문정왕후가 죽자 승려 보우()를 처벌하라는 소를 올렸다. 5월에 대사간이 되었고, 8월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윤원형의 죄를 논하였다. 이후 대사헌·대제학·이조판서등을 역임하였다. 1572년 이준경이 죽으면서 유차()를 올려 붕당을 없애라고 청한 것은 박순과 그의 동료들을 지칭한 것이어서 다른 신하들이 이를 변명하기도 하였다. 이 해에 우의정이 되었고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5년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여름에 서경덕의 증직과 시호를 청하여 우의정과 문간()의 시호를 받게 하고, 개성에 숭양서원()을 세워 정몽주를 제사하고 서경덕을 배향하게 하였다.
동서의 붕당 대립이 본격화되는 와중에서 서인의 영수로 지목되어 허엽()·김효원() 등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76년 이이가 사직하려 하자 왕에게 그를 우대할 것을 간청하였고 이후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이이 · 성혼 등을 극력 추천했다. 1579년 영의정이 되었으며, 공안()의 개정, 주현()의 병합, 감사()의 구임() 등 폐정의 개혁을 강력히 주장했다.
1584년 이이가 죽자 증직과 포상을 주청했다. 1585년 정여립()·김수()·이발() 등이 심의겸()·이이·성혼·박순 등을 공격하자, 벼슬을 버리고 용호()에 은거했다가1586년 이후로는 영평()의 백운계()에 집을 짓고 술과시로 세월을 보내었다. 1589년 67세로 죽었다. 부인은 제주 고씨()로서 선공감 판관() 몽삼()의 딸이며, 그 사이에 딸이 한 사람 있다.
박순의 문집인 『사암집』()은 1652년(효종 3)에 6권 2책으로 처음 간행되었고, 1857년(철종 8) 7권 3책으로 중간되었다. 『사암집』에서 부록 등을 제외한 본집은 모두 4권인데, 이 중 박순이 남긴 시가 3권을 차지한다. 박순은 "문장은 반고·사마천·한유·유종원·이백·두보를 근본으로 하되, 학문은 『소학』·『심경』·『근사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라고 했다는데, 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특히 당시풍()의 시를 짓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삼당시인()으로 불리는 최경창()·백광훈()·이달() 등에게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당시의 문단에서 압도적으로 유행하던 송시풍()을 당시풍으로 전환하는 데에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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