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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선조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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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상현 - 조선전기 사헌부지평, 배천군수, 동래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여산(). 자는 덕구(), 호는 천곡(). 부사맹() 송승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용교위() 송전()이고, 아버지는 현감 송복흥()이다. 어머니는 충의위() 김승석()의 딸이다.

10세에 경사()에 두루 통했으며 15세에 승보시()에 장원하고 20세에 진사가 되었다. 1576년(선조 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보임되고, 저작()·박사()에 승임()되었다. 이후 승정원주서() 겸 춘추관기사관()에 임명되었다가 경성판관으로 나갔다.

1583년 사헌부지평()으로 들어와 예조·호조·공조의 정랑이 되었다. 이듬해부터 두 차례에 걸쳐 종계변무사(使)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은계도찰방()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지평을 지내고 배천군수로 나갔다가 3년 만에 전직되어 경력()·집의·사간과 사재감()·군자감()의 정()이 되었다. 1591년 통정대부()에 오르고 동래부사가 되었다. 왜침의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방비를 굳게 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4일 부산진성을 침범한 왜군이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목패()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 )” 하자 이 때 부사인 송상현이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 )”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할 뜻을 천명하였다.

그 뒤 적군이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고 15일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군사를 이끌고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당하자 조복(: 관원이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예복)을 덮어 입고 단좌()한 채 순사하였다. 왜장 소 요시토시[] 등이 송상현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지내주었다 한다.

뒤에 이조판서·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산의 충렬사·개성의 숭절사()·청주의 신항서원()·고부의 정충사()·청원의 충렬묘()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이다.

 

 

송응개 글씨

 

 

2. 송응개 - 조선전기 홍문관박사, 사간원정언, 예조정랑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은진(). 자는 공부(). 안동부사 송여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서윤 송세충()이고, 아버지는 우참찬 송기수()이다. 어머니는 대사헌 채침()의 딸이다.

1555년(명종 10) 식년시에 생원으로 급제하였고, 1564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명종 20) 홍문관의 정자()·저작()을 거쳐서 홍문관의 박사·부수찬(), 사간원정언()을 지내고, 예조정랑으로 『명종실록()』 찬수에 참여하였다. 1570년(선조 3) 홍문관교리()가 된 뒤, 1573년 함경도에 재상어사()로 파견되었다.

이 때 덕원부사 안상() 등이 무죄인데 파직시켰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사헌부장령()이 되고, 시강관(), 홍문관의 부응교()·부교리, 사간원의 사간·집의(), 홍문관응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79년 승지로서 소위 이수()의 옥사에서 이를 석방하라는 왕의 명령을 철회할 것을 청하다가 다시 파직당하였다. 1583년 대사간이 된 뒤, 동·서 분당() 이후에는 동인의 중진으로서 활약하였다.

이 때 헌납 유영경(), 정언 정숙남(), 도승지 박근원(), 성균관전적() 허봉()과 함께 이이()를 탄핵하다가 장흥부사로 좌천되고, 다시 회령에 유배되었다.

강계·갑산에 귀양간 박근원·허봉과 아울러 세칭 계미삼찬()이라 하였다. 이 때 조헌()을 비롯, 전라도·해주 등지의 유생들로부터 맹렬한 배척을 받았다. 1585년 영의정 노수신()의 상소로 풀려났다.

 

 

3. 신각 -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평산(). 아버지는 신경안()이다. 작은아버지 신경민()에게 입양되었다.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 초에 연안·영흥의 부사를 거쳐, 1574년(선조 7) 경상좌수사, 1576년에 경상우병사를 역임하였다.

1586년 강화부사를 거쳐 이듬해 경상도방어사가 되었으나, 영흥부사 재직 시에 신창현감() 조희맹()이 그의 첩에서 난 아들을 납속()시켜서라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관의 곡식을 꺼내 그 납속을 충당해주었다가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었으며 서울 수비를 위하여 수성대장() 이양원() 휘하의 중위대장()에 임명되었고, 다시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부원수로서 한강을 지켰다.

이 때 김명원은 임진에 가 있었으므로 유도대장() 이양원을 따라 양주에 가서 흩어진 군졸들을 수습하고 함경도병마사 이혼()의 원군과 합세하여, 양주 해유령()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 결과 적의 머리 70급()을 베었는데 이것은 왜란 초기 처음 있는 승첩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이양원이 산골에 숨어 있어 소식이 끊겼는데, 신각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양원을 따라 도망쳤다는 내용의 장계()가 올려져 당시 우의정 유홍()에 의해 참형을 당하였다. 이날 오후 양주에서 다시 첩보가 도착하여 왕이 신각을 죽이지 말라고 선전관을 뒤따라 보냈으나, 이미 처형된 뒤였다.

무인이었으나 청렴, 근신했으므로 비명에 죽은 것을 모두 애석해하였다. 신각의 처 정씨()는 남편이 죽자 장사를 지낸 뒤 자결했는데, 정조 때 열녀문이 세워졌다. 연안의 현충사()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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