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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야사이야기

안하무인의 표본 대제학 변계량

by 무님 2020.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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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계량의 자는 거경, 호는 춘정이다. 목은 이색의 제자로, 14세에 진사, 15세에 생원, 17세에 문과에 급제한 수재였다. 고려조에서 진덕박사 등을 지냈고, 조선조에 들어와 주로 태종 때에 활약했다. 벼슬이 대제학을 거쳐 우군도종제부사에 이르렀다. 시문에 뛰어나 문명이 높았고, 시조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성품이 인색하기로 좆정의 비판이 자심했다. 변계량은 하찮은 물건일지라도 남에게 절대로 빌려주지 않았다. 그는 동과를 즐겨 먹었다. 동과는 동아라고도 하는데, 한방에서 그 씨를 약재로도 썼다. 오줌을 잘 나오게 하며, 부증, 소갈증 등에 쓰였다. 변계량은 소갈증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동과를 잘라먹은 뒤 자른 자리에 꼭 표를 해두었다. 다른 사람이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손님을 맞아 술을 마실 때는 잔 수를 계산하고 술병을 단단히 봉해두었다. 손님들은 그의 인색함에 놀라 고개를 저었다. 세종 때에 흥덕사에서 <국조보감>을 편찬했다. 변계량은 문장이 뛰어나 편찬에 발탁되었다. 세종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이따금 음식을 하사했다. 재상들도 앞다투어 술과 음식을 보냈다. 그의 방은 술과 음식으로 넘쳐났다. 그래도 그는 나누어 먹을 줄을 몰랐다. 외출을 할 때면 손을 탈까 봐 밖에서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그를 돕는 하인들이 군침을 삼켰으나 그는 아는 체하는 법이 없었다. 날짜가 오래된 음식이 썩어 구더기가 생기고 냄새가 진동했다.

"대감마님, 방 안에서 음식 썩은 냄새가 바깥을로 새어 나옵니다요."

"그러느냐? 가져다 수챗구멍에 버려라!"

하인이 들어와 썩은 음식을 가려내며 한마디 했다

"대감마님, 이 절편은 오늘 잡수시지 않으면 쉬겠습니다요."

"손대지 마라."

"양이 많은데 동자승에게 나누어주면 어떻겠는지요?"

"그냥 두어라."

이튿날 쉬어버린 절편을 하인이 수챗구멍에 넣기 바빴다. 미처 치우지 못한 썩은 음식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와 방바닥을 기어 다녔다. 그래도 썩히면 썩혔지 나누어 먹을 줄을 몰랐다.

그가 대제학 시절이었다. 그를 보좌하는 직제학 김구경이 그의 단점을 꼬집어 비방했다. 인색하고 식탐이 많은 점을 들어 선비답지 못하다고 흉을 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변계량이 <낙천정기>를 김구경에게 보였다. 그러자 구경이 헐뜯었다. "대감, 냄새가 납니다. 이 <낙천정기>는 성리를 논한 것이 <중용>의 서와 매우 흡사합니다."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변계량이 불쾌하게 여겼다. 김구경은 자신의 재주만 믿고 변계량을 업신여겼다. 언제나 변계량이 지은 글을 비웃었다. 변계량은 김구경의  사람됨을 경멸했다. 두 사람 사이가 크게 벌어졌다. 김구경은 끝내 벼슬이 오르지 않았다.

변계량은 성품이 편벽하고 고집이 대단했다. 중구에서 흰 꿩을 가지고 왔다. 조선 조정에서 하례하는 글 가운데 '오직 이 휜 꿩이라는 말의 자자'가 이었다. 변계량은 이 자 자를 띄어서 따로 써야 한다고 하여 여러 대신들과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대신들은 윗구절에 붙이지 않고 왜 띄어 써야 하느냐고 따졌다.  이것은 지극히 높은 이에게 관한 문구를 한 자 띄어 쓰거나 혹은 한 줄 올려 쓰는 것을 말한다. 여러 대신들은 한 자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고, 변계량은 띄어서 따로 써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세종이 대신들의 편을 들었다.

"대제학이 잘못 생각한 것 같소. 과인도 여러 대신들의 의견과 같소이다."

그러나 변계량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전하, 마땅히 밭을 가는 일은 하인에게 불어야 할 것이오며, 배를 짜는 일은 여종에게 불어야 할 것이옵나이다. 외교문서에 대해서는 마땅히 이 늙은 신하에게 맡기시고, 다른 말이 옳다 할 일이 아니 줄로 아옵니다."

세종과 여러 대신들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경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변계량은 대제학을 20여 년이나 맡았다. 그의 글은 격조가 높고 오묘하며 전아하여 따를 자가 없었다. 시는 맑으면서도 궁기가 없었으며, 담담하면서도 얕지 않았다. 태종은 변계량을 친구로 대했다. 그는 역대 신하들의 말이나 행실로써 경계가 되고 본받을 만한 것을 모아 <정부상규설>이라는 책을 짓기도 했다.

그의 인색함과 편벽, 그리고 고집은 그가 갈고닦는 문장과 시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렇다면 '사람이 곧 글이다.'라는 말은 변계량에게는 맞지 않는 말이 아닌가. 그의 글이 당대의 으뜸이 아니라면, 외교문서를 다루는 대제학 자리에 20여 년 동안이나 머무를 수 있었겠는가. 변계량의 참모습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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