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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연산군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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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순정 - 조선전기 숭정대부,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 자는 지옹(), 호는 청천(). 유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자해()이다. 아버지는 목사 유양()이며, 어머니는 정집()의 딸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활을 잘 쏘아서 무인 중에서도 비교할 자가 드물었다. 1487년(성종 18) 진사로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홍문관전적에 임명되었다. 그 뒤 훈련원정으로서 전라도 지방에 침투한 왜적을 수색, 포획하는 데 힘썼고, 1491년 함경도평사로서 도원수 허종()의 막료가 된 뒤 평안도평사를 역임하였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사헌부헌납으로서 임사홍()의 잔악함을 논박하고, 평안도절도사 전림()의 권력 남용을 추궁하는 한편, 야인 문제에 대한 대책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 뒤 홍문관교리가 되었는데, 문신으로서의 활솜씨로 특별히 부응교에 임명되었다. 이어 집의()를 거쳐 의주목사로 나가 압록강 연안의 야인 정벌 때 도원수의 종사관으로 적정 탐지에 공을 크게 세웠다. 아울러 군자 확보와 성곽 수축 등 군비 강화에 힘썼다. 1503년에는 공조참판으로서 하정사(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연산군의 밤사냥이 불편함을 진언했다가 임사홍의 모략으로 추국당하였다. 1506년 이조판서로서 박원종()·성희안() 등과 함께 중종반정을 모의, 거사해 그 공으로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청천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숭정대부()에 올랐다. 이어 병조판서로서 영경연사()를 겸임해 폐지한 경연 부활에 앞장섰다. 얼마 뒤 우의정으로 승진하고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507년 이과() 등이 견성군()을 추대해 역모를 꾸미자, 이를 처리한 공로로 정난공신() 1등에 다시 책록되었다. 이듬해 평안도 인산()·강계에 둔전()을 설치해 군자를 강화하였다. 이어 좌의정이 되어 박영문()·유담년()을 포도대장으로 삼아, 당시 경기도 인천·김포·통진 일대에 횡행한 강도를 처리하고 유민의 안집책()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1510년 경오왜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가 되어 병사를 총괄했으며, 다시 도원수로서 현지에 출동해 삼포()의 난을 평정하고, 각 포의 비왜방략()을 마련하였다. 이 때 대간들로부터 재물을 축적했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오히려 군공을 인정받아 영의정에 올랐다. 2개월 후 병사하자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이후 성렬()로 고쳐졌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2. 윤필상 - 1427(세종 9)∼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파평(). 자는 탕좌()·양경(). 삼한공신 윤신달()의 후예이다. 윤곤()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윤희제()이다. 아버지는 윤경()이며, 어머니는 이림()의 딸이다.

1447년(세종 29) 사마시를 거쳐 1450년 추장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453년(단종 1) 저작이 되었고, 1455년(세조 1) 호조좌랑으로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된 뒤 서연관()이 되었다.

1457년 중시에 급제했으며, 1463년 동부승지가 된 뒤 형방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면서 세조의 측근에서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특히, 형방승지로 있을 때 날씨가 매우 춥자 서울과 지방에 있는 죄수들을 낱낱이 상고해 작은 책자에 기록해 두었다가, 세조의 죄수 현황을 묻는 물음에 즉시 응답해 신임을 두터이 하였다.

이를 계기로 계속 승진했으며, 1467년이시애()의 난 때 도승지로 왕명을 신속히 처리해 우참찬에 특배되고, 적개공신() 1등에 녹훈되어 파평군()에 봉해졌다. 같은 해 강순() 등이 파저강() 주위의 야인을 토벌할 때 왕명을 받고 진군에 가서 개선군들을 위유()하였다.

이듬해는 원접사(使)인 안주선위사(使)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 이 해에 세조가 죽자 수묘관()으로 능을 3년간이나 지켰고, 좌리공신()이 되었다.

1471년(성종 2) 우찬성으로 재직시 경상도에 가뭄이 들어 기근이 심하자 진휼사(使)가 되어 기민을 구제했고, 다시 경상도관찰사를 겸해 이듬해까지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한 공으로 모의()·녹비화[鹿]를 하사받았다.

그 뒤 1474년에는 이조판서·의금부당상을 겸직하다가 한명회()·노사신() 등 권신들이 전권을 오로지하면서, 이조의 권한인 인사권까지 침해하므로 이에 분개해 사직하였다. 그러나 곧 복직되어 1477년에는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아 사복을 채웠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이 해 다시 풀려 나와 좌찬성이 되고, 주청사(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건주위()의 야인들을 자세히 탐지, 보고했으며, 이듬해 영중추부사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479년 명나라에서 야인을 치려고 조선에 군사를 요청하자 어유소()를 도원수로 하여 정벌군을 보냈으나, 어유소의 군대가 얼음이 녹아 강을 건널 수 없다는 이유로 되돌아왔다.

일이 급박해지자 한명회 등이 다시 정벌군을 뽑아 보낼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이에 윤필상은 우의정으로 서정도원수(西)로 뽑혀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건주위를 토벌, 큰 전과를 거두고 돌아왔다. 1481년 사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4년에는 영의정이 되어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496년(연산군 2)에는 궤장()을 하사받는 영예를 누렸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지난 성종 때에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의 폐위를 막지 않았다고 추죄(: 일이 마무리된 후에 다시 죄를 다스림.)되어, 진원()의 유배지에서 사사()의 명을 받았으나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 뒤 중종반정 때에 신원되었다. 국사를 논하는 데에 임금의 뜻에만 영합했으므로 사림()이 윤필상을 마땅치 못하게 여겼다.

 

 

3. 이극균 - 1437(세종 19)∼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이다. 자는 방형()이다. 집()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지직()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인손()이며, 어머니는 노신()의 딸이다.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했다. 무술에도 뛰어나 세조의 총애를 받고 선전관이 되었다. 1459년 성균관주부를 거치고, 이어 회령도사·지평, 도체찰사의 종사관을 역임하였다. 이듬 해김구()·최항()·정인지() 등과 함께 『교정손자주해()』를 찬하였다. 1467년 부호군으로 만포절제사(滿使)가 되었다. 건주위 정벌의 군공으로 3등공신이 되어 노비 6구()가 하사되었다. 1469년(예종 1)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472년(성종 3)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1474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 해 동지중추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7년 영안도관찰사가 되고, 1479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1481년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이어 평안도절도사·한성부판윤·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484년 대사헌을 거쳐 1486년에는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의금부당상·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95년(연산군 1) 다시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498년에는 좌찬성을 역임했다. 이듬 해에는 경변사(使)로 나아갔다. 1500년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그 이듬 해 좌의정 성준()과 함께 『서북제번기(西)』와 『서북지도(西)』를 편찬하였다. 1502년에는 영의정 및 좌의정과 함께 시폐십조()를 왕에게 상소하였다. 1503년에는 좌의정이 되었다. 그가 여러 차례 연산군의 황음()을 바로잡으려고 애쓴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 해 갑자사화 때 조카 세좌()와 함께 연루되어 인동()으로 귀양가서 사사되었고, 뒤에 신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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