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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자주독립, 자주민권이 목표 < 독립협회 >

by 무님 2020.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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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는 1896년(고종 33) 7월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이다. 정부의 외세의존정책에 반대하는 개화 지식층이 한국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표방하고 활동하였다.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에 나선 서재필()을 중심으로 이상재()·이승만()·윤치호() 등이 적극 참여하였으며, 협회 발족 당시에는 이완용()·안경수() 등 정부 요인들도 다수 참가하였다.

초기에는 토론회·연설회 등 민중계몽운동에 힘써서 많은 젊은이들을 모았으며, 나중에는 정치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고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그 해 11월에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집회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독립협회운동은 다음과 같이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의 창립으로부터 토론회를 개최하기 이전인 1897년 8월 28일까지로 잡을 수 있다. 이 시기는 창립사업기 또는 고급관료 주도기이다.

서재필의 지도 아래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의 조성 등 창립사업에 주력하던 시기이다. 자주독립의 기념물 건립을 위한 창립사업은 커다란 공감을 일으켰다. 독립협회는 사회 일반의 참여 뿐만 아니라 관료와 왕실의 지원을 받아, 짧은 기간에 거대한 사회단체로 부각되었다. 거의 모든 고급관료와 다수의 일반 민중이 독립문 건립 보조금을 내었고 독립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창립총회에서 선임된 임원진은 고문에 서재필, 회장에 안경수(), 위원장에 이완용(), 위원에는 김가진()·김종한()·이상재 등 8명, 간사원에는 송헌빈()·남궁 억 등 10명 등으로 당시 국내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망라되었다.

1896년 말에는 회원수가 2,000명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일반민중 회원은 아직 표면에 나서지 못했고, 독립협회는 개혁파와 보수파 고급관료의 주도 하에 있었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 고급관료의 사교 모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제2기는 독립협회가 정기적인 토론회를 시작한 1897년 8월 29일부터 독립협회의 구국선언 이전인 1898년 2월 20일까지로, 민중계몽기 또는 민중진출기이다.

서재필·윤치호의 지도 아래 토론회와 강연회를 통해, 회원들에게 효과적인 의사 표현의 방법과 민주적인 행동 성향을 체득하게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민중을 새로운 지식과 교양으로 적극 계몽하여, 독립협회 안에 민중의 진출이 뚜렷해진 시기이다. 특히 토론회는 독립협회의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97년 말기에는 독립협회 토론회와 ≪독립신문≫은 러시아인 재정고문 고용문제와 관련해 보수파 정권의 외세의존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보수적 관료층은 독립협회에서 점차 이탈하게 되었고, 독립협회는 개혁파 관료들과 재야·신지식층이 주도하는 민중적 사회단체로 전환되어갔다. 또한 직제도 크게 개편되었다. 위원장제를 없애고 회장·부회장·서기·회계·제의() 등 상설 직제를 두고, 상임집행부의 기구와 권한을 강화하여 바로 회중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독립협회는 운동의 제1기와 제2기를 통해 창립사업과정에서 민중의 지지기반을 확보했고, 그 표현기관인 ≪독립신문≫과 ≪독립협회회보≫ 등 언론과 출판 활동으로 여론 조성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협성회·광무협회같은 학생단체에 의한 대중동원 체제를 확보했으며, 토론회·강연회를 활성화하여 국권·민권·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리하여 다음 단계의 민중의 정치운동을 위한 준비단계로서, 민중 계몽·민력 조성·민력 단합의 길을 닦아나가게 되었다. 결국 이 두 시기의 독립협회는 사회계몽단체 또는 관민합동의 애국단체였다고 하겠다.

제3기는 독립협회가 구국운동을 선언한 1898년 2월 21일부터 김홍륙독다사건() 이전인 그 해 9월 10일까지로, 민중운동기 또는 민중주도기이다.

구국운동을 선언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독립협회가 민중의 정치활동을 통해 민의를 국가 정책에 반영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외세의 이권 침탈과 내정 간섭을 민중의 힘으로 배제하려는 국익·국권·국토 수호를 포괄하는 자주국권운동과, 전근대적인 압제와 수탈로부터 신체와 재산권의 자유 등 인권을 보장하려는 자유민권운동, 그리고 민권의 신장과 국권의 강화를 위해 관민의 합력기구로서 의회 설립을 추구한 국민참정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 회원은 관료층이 대거 퇴진하고 재야인사들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임원진도 개편되어 회장에 이완용(전라도관찰사로 전임), 부회장 겸 회장 대리에 윤치호, 서기에 남궁 억, 회계에 이상재·윤효정(), 제의에 정교·양홍묵()·이건호(), 사법위원에 안영수()·강화석()·홍긍섭() 등 개혁파 중심 체제로 전환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국권·민권 운동의 담당 세력도 만민공동회를 계기로 독립협회 회원 중심에서 민중체제로 전환되는 양상을 띠었다. 집요한 민중운동은 정부와의 대립 의식을 발생시켜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이 당시의 독립협회는 정치집단으로서 재야정치세력의 선도적 구실을 담당했으나, 정부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민권을 쟁취하려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정부와 협력하여 외세를 막고 관인을 깨우쳐 민권을 보호하려는 데 머물렀던 것이다.

이 때에 앞서의 협성회와 광무협회 외에도 공주의 독립협회, 인천의 박문협회()·찬양회()·보민협회()·황국중앙총상회() 등 다수의 독립협회 지지단체들이 설립되었고, 독립협회의 반대세력인 황국협회()도 등장하였다. 제4기는 김홍륙독다사건이 발생된 1898년 9월 11일부터 민회 금압령이 내려진 그 해 12월 25일까지로, 민중투쟁기 또는 민권투쟁기이다.

독립협회·황국중앙총상회·만민공동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이 김홍륙 일당의 고종암살미수사건을 계기로 국왕과 정부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민주주의의 기본적 자유를 쟁취하고 입헌대의정치를 추구했던 관권 대 민권의 투쟁기였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는 민중과 더불어 ①보수내각을 붕괴시키고 진보내각을 구성하도록 했으며, ②언론·집회 자유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고 관민공동회()를 열어 인민헌의안()을 수락하게 하였고, ③민선의회()의 성격이 가미된 중추원 관제를 공포케 하여 인민참정권을 공인하게 하는 등 민권투쟁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공화제 추진설을 거짓 유포한 보수파의 반동적인 익명서 사건()으로, 개혁내각이 붕괴되고 의회 설립운동이 좌절되면서 민중의 정부에 대한 불신감이 깊어졌다.

이에 국왕이 개혁정치의 실천을 약속했으나 그 실천이 지연되어 민중의 국왕에 대한 불신감도 생겼다. 따라서 만민동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들이 극한 투쟁을 벌여 자못 혁명적인 분위기를 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 회원은 재야인사 중 소장층의 강경파가 행동의 주류를 이루었다. 임원진도 회장에 윤치호, 부회장에 이상재, 서기에 박치훈·한만용(), 회계에 이일상, 사법위원에 남궁 억·정교, 그리고 평의원 20명 등으로 구성되어, 민중을 대변하는 체제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이 때에는 종로 인화문 앞, 각 부 문전 등 옥외가 주된 활동무대였고, 독립관과 광통교 사무실은 옥외 투쟁의 기획실처럼 되었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는 4,000여명의 회원과 전국적인 지회, 각종의 민권단체와 수많은 민중의 열띤 지지와 호응을 받은 전 국민의 대표기관으로 공인되었으며, 정부에 대해서는 강력한 정치적 압력단체가 되었다.

독립협회의 사상은 자주국권에 의한 독립국가를 추구한 민족주의 사상과, 자유민권에 의한 국민국가를 추구한 민주주의 사상, 그리고 자강개혁에 의한 문명국가를 추구한 근대화 사상으로 집약된다. 이들 사상은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내적으로 통합되어 하나의 유기적인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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