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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조선 18대 왕 현종 - 이 연

by 무님 2020.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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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조선시대 제18대 왕(재위 1659∼1674)으로 효종의 아들이다. 효종의 상례()시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에 서인의 기년설(:1년설)을 채택하고,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자 2차 복상문제에서 남인의 기년제를 채택, 재위 중 남인과 서인의 당쟁이 계속되어 국력이 쇠퇴해졌다.

 

 

현종 유묵

 

 

현종의 재위 기간은  1659∼1674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이름은 이원()이다. 이름으로 쓰이는 한자는 ‘굽을 연’자로 쓰이지만, 〈인조실록()〉(인조 26년 9월 9일)에는 이름의 음이 ‘집 원()’자와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는 경직()으로 효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의 딸 인선왕후()이다. 비는 영돈녕부사 김우명()의 딸 명성왕후()이다.

현종은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에 청나라의 볼모로 심양()에 있을 때 심관()에서 출생하였다. 이후, 왕자였던 아버지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현종도 자연스레 세손으로 책봉되었다. 

 

1649년(인조 27)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1651년(효종 2)에 왕세자로 진봉()되었다. 현종은 효종의 뒤를 이어 1659년에 즉위하여 재위 15년 동안 대부분을 예론을 둘러싼 정쟁 속에서 지냈다.

1662년(현종 3) 호남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1668년 동철활자() 10여 만자를 주조했으며, 혼천의()를 만들어 천문관측과 역법()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또, 지방관의 상피법()을 제정했고, 동성통혼()을 금지시켰다.

1666년에는 1653년에 제주도에 표류해 온 하멜(Hamel,H.) 등 8명이 전라도 좌수영을 탈출하여, 억류 생활 14년 간의 이야기인 『화란선제주도난파기()-하멜표류기()』와 그 부록인 <조선국기 >를 저술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현종은 효종대에 은밀히 계획해 놓은 청나라에 대한 보복정벌인 북벌을 국제관계와 국내 사정으로 중단하는 대신 군비()에 힘써 훈련별대()를 창설하였다. 현종대에는 이미 망한 명나라를 숭모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런 숭명활동은 다음의 숙종 때부터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기해복제() 문제라는 예론에 부딪혔다. 즉, 효종의 상을 당하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의 복제문제가 정쟁으로 번진 것이다. 당시 일반사회에서는 주자의 『가례()』에 의한 사례()의 준칙을 따랐다. 그러나 왕가에서는 성종 때 제정된 『오례의()』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의 관계와 같은 사례가 없었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서 왕위에 있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책립되었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의 예로 3년상의 상복을 이미 입[]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해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서인측은 송시열()과 송준길()이 주동이 되어, 효종이 둘째 아들이므로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인측의 윤휴()하와 허목() 등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고 해도 왕위를 이어받았으므로 3년상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 무렵 정치계는 1575년(선조 8) 동인에게 배척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정치계에 되돌아온 서인과, 동인 계열이지만 북인·남인으로 갈라진 뒤 북인에게 배척되었다가 역시 인조 때 조정에 복귀한 남인 사이의 대립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도 인조·효종 때는 감정적인 대립이 적어서 특히 학문에서는 교섭이 원활하였다.

그렇지만 예론이라는 당론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달아 감정이 격해지고 논쟁이 장기화되자, 서인측의 주장대로 기년복이 조정에서 일단 결정되었다. 그렇지만 예론이 지방으로 번져 그 시비가 더욱 확대되었다. 그러자 1666년 조정에서 기년복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이에 항의하면 그 이유를 불문하고 엄벌에 처할 것을 포고하기에 이르렀다. 1674년 왕대비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문제가 재론되면서 예론이 또다시 거론되었다. 즉, 서인측의 대공설(9개월복)과 남인측의 기년설이 대립한 것이다. 그 뒤 이 문제가 기년복으로 정착되면서 서인측의 주장이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현종 초년에 벌어진 예론도 수정이 불가피해졌고, 이 때 서인측이 많이 배척되었다. 이 문제는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되어 1679년(숙종 5) 20년 간에 걸친 기해복제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다. 이로써 형식적으로는 조정에서 다시 거론되지 않았지만, 이후에도 많은 시비가 내면적으로 계속되었다.

이 예론은 예()의 본질론(-)에 입각한 서인측의 예 관념과, 행용론(-)에 치중한 남인측 예 관념의 학문적인 해석이 당론으로 발전하면서 당쟁의 비극으로까지 파급된 것이다. 이렇게 현종대는 예론의 시비로 일관하다시피 했고, 당론 싸움으로 날이 새고 졌다.

그리하여 현종이 죽은 뒤에 찬수된 『현종실록』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종실록』은 숙종 1년(1675)에 편찬에 들어갔으나 여의치 못하다가 숙종의 독촉을 받고 1677년에 겨우 완성된 졸속 실록이다. 아울러 『현종실록』 편찬에, 현종 말년 이후 숙종 초년에 걸쳐 득세한 남인측이 많이 참여했으므로 서인측은 불만이 많았다.

1680년 경신대출척을 계기로 서인이 다시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뒤 서인 중심의 실록개수청()을 설치하였다. 1683년에 28권의 『현종개수실록()』이 완성되었다.

조선시대의 수정 실록()은 『선조실록』과 『경종실록』이 있고, 개수실록은 이 『현종실록』이다. 이 모두 당쟁의 결과 부득이 개수 또는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현종개수실록』의 성격과 당시의 당쟁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시호는 소휴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이다. 묘호는 현종()이다. 능호는 숭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현종의 가계도

 

 

현종은 후궁 없이 중전 명성왕후 김씨에게만 충실했는데, 금슬 자체는 그럭저럭 좋았다고 하나 그렇게 사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왕후가 태종비 원경왕후 민씨처럼 워낙 성깔 있기로 유명해서 이 때문에 후궁을 들이지 못했다고도 한다(조선의 왕으로서는 유일하다). 화를 낼 때는 단호했지만 아버지나 아내, 아들과는 정반대로 현종은 기본적으로는 매우 온화한 성품이었다고. 정종처럼 애처가와 공처가의 일면을 동시에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명성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는데,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는 혼례 직전에 급사했고, 왕세자와 막내 명안공주만이 장성하여 혼인을 하였다. 그나마도 명안공주는 숙종 13년 5월 16일에 2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이때부터 조선 왕조는 점점 후손이 귀해지기 시작했는데, 결국 어렵게 왕통(王統)을 이어가다가 헌종 때 단절되었고 철종이 간신히 이었으나, 그마저도 단절되면서 왕위를 이을 가까운 왕손이 없다는, 명종 사후 때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까지 가게 된다. 이것은 후기에 들면서 초기와 달리 자손이 귀해진 것도 있고 역모에 거론된 왕족들이 자꾸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또 이때부터 공주들은 시집가서 아들이든, 딸이든 일체 자식을 보지 못했다. 자식이 아예 없는 경종과 순종 황제는 일단 빼고 정조, 순조의 딸들은 자식을 낳지 못했고 숙종, 헌종, 철종, 고종 황제의 딸들은 요절했다.
사후에 현종(顯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는데 전조의 같은 묘호를 받은 군주를 생각한다면 신하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던 군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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