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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 숭명배청 >의 상징 김상헌

by 무님 2020.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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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 1570〔선조 3〕∼1652〔효종 3〕)은 한국사에서 절개와 지조의 한 상징이다. 그 상징의 핵심은 ‘숭명배청()’일 것이다. 그의 생몰년은 그가 조선시대의 가장 험난한 격동기를 통과했음을 알려준다. 82년에 걸친 긴 생애동안 김상헌은 왜란과 호란을 모두 겪었다. 전쟁으로 목숨까지 잃은 수많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가 특별히 혹독한 고통을 겪었다고 확언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노령에 청의 심양()까지 압송된 것을 포함한 여러 사실은 그가 적지 않은 육체적ㆍ정신적 역경을 거쳤음을 수긍하게 만든다.

그 시대에 그의 판단과 처신이 옳았는가 하는 측면은, 거의 모든 사안이 그렇듯이, 여러 의견이 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명료한 이념을 철저히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 이념과 실천은, 그뒤 ‘북학’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정계와 사상계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리고 뒤에서 보듯이 조선후기의 대표적 세도가문인 안동(장동) 김씨는 실질적으로 김상헌에서 출발했다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8호 문정공 김상헌 진적

 

김상헌은 1570(선조 3)∼1652(효종 3)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 호는 청음()·석실산인(: 중년 이후 退해 있으면서 사용)·서간노인(西: 만년에 에 은거하면서 사용). 서울 출생이다. 김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김생해()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김극효()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의 딸이다. 우의정 김상용()의 동생이다. 

 

그는 1570년(선조 3) 6월 3일에 서울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연보]에는 어머니가 임신한 지 12개월 만에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김극효(, 1542〜1618. 자는 희민〔〕, 호는 사미당〔〕)는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했고, 양구()ㆍ동복현감()ㆍ금산군수()ㆍ돈녕부 도정ㆍ동지돈녕부사 등 주로 외직이나 중앙의 한직에서 근무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외가의 성세는 대단했다. 우선 외조 정유길(, 1515∼1588. 본관 동래)은 좌의정을 역임한 당시의 대표적인 대신이었다. 정유길의 조부는 중종 중반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 1462∼1538)이고, 증조는 성종 때 이조ㆍ공조ㆍ호조판서를 역임하고 좌리()공신에 책봉된 정난종(, 1433∼1489)이었다.

후손들도 매우 뛰어났는데, 정유길의 아들 정창연(, 1552∼1636)은 좌의정, 손자 정광성(, 1576∼1654)은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 뒤에도 이 지파에서는 정태화(, 1602∼1673. 영의정) ㆍ정치화(, 1609∼1677. 좌의정)ㆍ정만화(, 1614∼1669. 이조참판)ㆍ정재숭(, 1632∼1692. 우의정)ㆍ정석삼(, 1684∼1729. 호조참판)ㆍ정홍순(, 1720∼1784. 우의정) 등 조선 후기의 주요한 대신을 여럿 배출했다.

조선 중기부터 종통(: 종가 맏아들의 혈통)이 중시되면서 양자 입적이 활발해지는데, 김상헌은 자신이 입적되고 후손도 입적시키는 이례적인 경험을 모두 겪었다. 그는 2세 때 큰아버지 김대효(, 1531〜1572)가 후사를 두지 못하고 별세하자 그에게 입적되었다(1572년〔선조 2〕). 9세부터 친부에게서 글을 배웠고(1578년〔선조 11〕), 12세 때는 천연두에 걸려 아주 위독했다가 이듬해에야 간신히 나았다(1582년〔선조 15〕). 그 뒤 김상헌은 15세 때 성주() 이씨(선전관 이의로〔〕의 딸)과 혼인했고(1585년〔선조 18〕), 5년 뒤인 20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다(1590년〔선조 23〕).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통례원 인의()가 되고 이어 예조좌랑·시강원사서()·이조좌랑·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601년 제주도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진상 조사와 수령들의 근무상황을 점검하라는 임무를 띠고 어사로 파견되었다. 선조 말년에는 정인홍() 등이 성혼()을 모함할 때 같이 연루되어 고산찰방()·경성판관() 등의 외직으로 전보되었다.

광해군 대에도 북인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그다지 뚜렷한 관직을 역임하지 못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 등이 상소를 올려 이황()과 이언적()을 격렬히 비난하자, 승지로 있으면서 정인홍을 비난하였다. 폐모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데다 광해군 말년에는 연이어 부모 상을 맞아 물러나 있어야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조정에 나가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로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난 직후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붕당을 타파하고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반정 이후에도 강직한 성격으로 누차 시사를 비판하다가, 반정 주체들의 뜻에 거슬려 향리로 귀향하기도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의 관직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인조가 자신의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이른바 추숭논의()가 일어나자 그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한 반정공신 이귀()와 의견 충돌을 빚어 다시 낙향하였다.

1633년부터 2년 동안은 5차례나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강직한 언론활동을 벌이다가 출사와 사직을 반복하였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도 그는 석실에 있었다. 66세의 노대신은 남한산성으로 몽진(: 난리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피함)한 조정을 뒤따라 들어갔고, 그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척화와 항전을 주장했다. “오늘의 계책은 반드시 먼저 싸워 본 뒤에 화친을 해야 합니다. 만약 비굴한 말로 강화해 주기만을 요청한다면, 강화 역시 이룰 가망이 없습니다.”

이런 판단을 근거로 김상헌은 세자를 인질로 보내는 데 반대했고, 최명길(, 1586∼1647)이 지은 항복 국서를 찢어버렸다. 그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인조의 물음에 “천도()를 믿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인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청음집] <연보>).

1637년 1월에 김상헌은 죽음을 결행하기도 했다. 엿새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고, 옆에 있던 사람이 풀어주어 살아나기는 했지만, 스스로 목을 매 거의 죽을 뻔한 것이다.

그달 그믐, 인조는 성을 나왔고 항복의 맹약이 체결되었다. 왕조 역사에서 처음 겪는 가장 큰 굴욕이었다. 척화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67세의 노대신의 마음은 그지없이 참담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김상헌은 여러 고초를 겪었다. 물론 반청()의 댓가였다. 1637년 2월 7일에 그는 안동으로 낙향했다. 형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순절했다는 소식을 들은 며칠 뒤였다.

3년 뒤인 1640년(인조 18) 11월에 김상헌은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청의 장수 용골대()는 김상헌이라는 인물이 관작도 받지 않고 청의 연호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고, 조정에서는 그를 심양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12월에 그가 도성을 지날 때 인조는 어찰(: 임금의 편지)을 내려 위로했다.

 

' 경은 선조()의 옛 신하로서 나를 따라 함께한 지 역시 여러 해가 되었다. 의리로는 군신 사이지만 정리로는 부자와 같다. 뜻밖에 화란이 터져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참으로 내가 현명하지 못한 소치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서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껄끄러운 사정이 있어 그렇게 못했다. 경은 모쪼록 잘 대답해 저들의 노여움을 풀어주기 바란다. '

 

김상헌은 “소신이 형편없이 못난 탓에 끝내 성상의 은혜에 우러러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죄가 만 번 죽어도 모자랍니다”라고 화답했다. 그를 만나고 온 신하들은 행동이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김상헌은 1641년(인조 19) 심양의 북관()에 구류되었다. 그해 11월 부인 이씨가 안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도 병이 심해져 12월에 의주()로 보내졌다가 1643년 1월에 다시 심양으로 끌려갔다.

그때 대표적 주화론자인 최명길도 심양에 잡혀와 있었다. 16세 차이로 조선을 대표하는 두 대신이 포로의 신세로 주고받은 시는 극명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최명길은 “끓는 물과 얼음 모두 물이고, 가죽 옷과 갈포 옷 모두 옷이네(, )”라고 읊었고, 김상헌은 그 운에 맞춰 이렇게 화답했다.

 

' 성패는 천운에 관계되어 있으니                                                  
의()에 맞는가를 보아야 하리                                                   
아침과 저녁이 뒤바뀐다고 해도                                                  
치마와 웃옷을 거꾸로 입어서야 되겠는가                                 
권도()는 현인도 그르칠 수 있지만                                      
정도()는 많은 사람들이 어기지 못하리                              
이치에 밝은 선비께 말하노니                                                      
급한 때도 저울질을 신중히 하시기를                                         機   '

 

이듬해 2월에 김상헌은 소현세자(, 1612~1645)를 모시고 귀국했다. 그는 바로 석실로 돌아갔다. 소현세자는 두 달 뒤 급서했다.

이때부터 별세할 때까지 김상헌은 주로 석실에 머물렀다. 1646년(인조 24) 3월에는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무려 32번이나 사직해 한직인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이때 송시열(, 1607∼1689)이 열흘 정도 머물렀는데, 함께 [근사록()]에 나오는 중요한 말을 선정했다.

1649년 5월에 효종이 즉위하자 다시 한번 좌의정으로 불렀으나 역시 고사했다. 그 대신 10월에 임금을 알현하면서 인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 대사헌 김집()을 중용할 것을 당부했다.

‘숭명배청’의 절개를 상징하는 노대신의 일생은 3년 뒤인 1652년(효종 3) 6월 25일, 82세로 마감되었다. 그는 석실의 선영에 모셔졌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양주에 세워진 석실서원을 비롯한 여러 서원과 남한산성 현절사()에 모셔졌으며, 효종의 묘정에도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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