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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청나라에 파병을 <나선 정벌>

by 무님 2020.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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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선 전쟁이란 조선 효종 때 연해주 흑룡강 방면으로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조선군사(총수병)가 청나라 군사와 함께 정벌한 일을 말한다. 나선()은 러시아(Russia)를 지칭한다. 조선 효종 때 연해주 흑룡강 방면으로 남하하는 루스 차르국에 대항하여 청나라와 조선 연합군이 벌인 전투. 나선정벌은 한국에서만 쓰이는 용어로 중국과 러시아 모두 '청-러시아 국경분쟁'을 표제어로 쓰고 있다.

 

나선정벌 전개도

 

나선 전쟁의 배경은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던 모스크바 대공국을 이어 루스 차르국(이하 러시아)은 이반 4세 때 유럽으로 진출하고자 리보니아 전쟁을 벌였으나 실패하자 세력을 기르기 위해 모피무역을 선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보니아 전쟁 이전 시베리아 진출이 가능한 환경이 조성되자 러시아 정부는 카자크들을 고용해 동쪽으로 파병했다. 이 카자크들의 시베리아 침략은 예르마크의 시비르 칸국 원정으로 가속화되었고 그러다 끝내 청나라의 영토에 맞닿게 되었다. 아무르강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한 러시아의 카자크들은 여기에 성을 쌓고 모피나 목재, 광물 자원 등을 획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한다.
문제는 청나라도 아무르강 일대를 점령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는 것이었다. 이곳의 원주민들도 여러번 두들겨패서 겨우 복속시킨 상황이었고, 이곳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큰 상황이었다. 그런데 러시아가 갑자기 그 활동 범위를 점차 넓혀 우수리강 하구를 지나 송화강 방면으로까지 내려왔다. 청나라는 이곳의 지배권을 내주고 싶지 않았고, 결국 군사를 동원하여 러시아를 격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패배를 거듭한 청나라는 무기 수준이 낙후하여 러시아를 저지하는 게 불가능함을 깨닫고, 임진왜란 이후 조총 운용 능력을 양성해온 조선에 총수병(銃手兵)을 요청하였다. 1651년(효종 2) 러시아인들은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흑룡강() 일대에 진출하여 성을 쌓고 곡물과 광물자원 등을 획득하기 위한 경제활동을 전개하면서 청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러시아인들은 그 활동 범위를 점차 넓혀 우수리강 하구를 지나 송화강() 방면으로 내려왔고, 이에 대항하여 청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격퇴하려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이 총포로 무장한 러시아인들에게 계속 연패하였고, 1653년 러시아는 이 지역의 경략을 국가 목표로 삼았다.

청은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격퇴하려 하였으나 무기 수준에서 낙후되어 불가능함을 알고, 임진왜란 이후 조총을 사용하는 조선에 총수병을 요청하였다(1654, 효종 5). 조선에서는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에게 조총군 100명과 초관() 50여 명을 주어 지원군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모란강(무단장 ) 상류지역의 영고탑(/)에 이르러 명안달리()가 이끄는 청군 3천여 명과 합세하여 북상하다가 혼동강(, 송화강 중류 지점)상에서 러시아군을 만나 교전하였다(4월 28일). 결과 7일만에 적군을 패퇴시키고 조선군은 6월에 본국 개선하였다. 청은 조선 총수의 위력을 처음 경험하였다. 이것이 제1차 나선정벌이다.

 

그 뒤에도 러시아군이 흑룡강 방면에서 계속 활동하고 이에 대한 청나라 군사의 출정이 자주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1658년 3월청나라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선 조총군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혜산진첨사 신류(申瀏)를 대장으로 삼아 조총군 200명과 초관 기고수 등 60여명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섰다.

조선 군사들은 5월에 영고탑에 들어가 청나라 군사와 합류, 흑룡강에 나아갔다. 6월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러시아 군사를 만났다. 러시아측에서 큰 배 10여척에 군사를 싣고 당당한 기세로 공격하고 육상에서도 적군이 공격을 해오자 청나라 군사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 군사가 용감하게 나아가 화전(火箭)으로 적선을 불태우자 흩어져 도망갔다. 이 전투로 흑룡강 방면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군사의 주력이 거의 섬멸되었다. 조선 측에서도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들은 청나라의 요청으로 얼마 동안 송화강 방면에 머무르다가 그 해 가을 영고탑을 거쳐 개선하였다. 이것이 제2차 정벌이었다. 2차에 걸친 러시아 정벌은 효종의 즉위 후부터 준비해왔던 북벌계획을 간접적으로 실현한 결과였다. 이 때 비록 적은 수의 군사를 보냈으나 큰 전과를 올리게 된 것은 당시 사격술과 전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선 전쟁의 결과는 1차의 경우 7일만에 적군을 패퇴시키고 조선군은 6월에 본국으로 개선하였다. 루스 차르국 소속 카자크족은 조선 포수의 위력에 놀라서 대두인(나나이)라고 말하며 두려워 했다고 한다.
2차의 경우 10여 척의 배를 앞세우고 공격해 오는 러시아군에 총과 불화살로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청군은 조선군을 선봉으로 세우려 했는데 조선군은 작은 자피선만 가지고 있어서 러시아의 큰 군함에 대응할 수 없어 취소되었다. 방심하고 배에서 대기를 하던 러시아군을 향해 기습적으로 불을 저질러 큰 혼란을 주는 방법으로 스테파노프를 포함하여 270여 명이 전사하였고 잔당은 모두 패퇴하였다. 조선군은 전사자 7명을 냈는데 전사자가 나온 경로가 황당하다. 조선군의 조총 사격에 러시아인들은 모두 뱃속에 숨어 있었고 조선군과 청군은 러시아배에 불을 질렀으나 러시아배에 실린 재물을 탐한 청나라 장수가 배의 불을 진화하고 전리품을 얻을 것을 명령하면서 조선병사들은 황급히 불을 끄고 다시 배로 돌아가는 뻘짓을 해야 했다. 그때 숨어있던 러시아인들이 사격을 가하면서 조선군 7명을 포함한 다수의 전사자가 났고 뒷치기에 분노한 조선군은 반격을 가해 러시아인들을 모두 섬멸했다. 청군은 조선군 시신을 나포한 러시아 함선에 올려 화장하면서 강에 떠내려 보낼 것을 명령했으나 조선군은 조국의 산하에 묻어주진 못할 망정 이국에서 그것도 이국의 배와 함께 태워 가라앉게 할 순 없다고 하며 근처에서 매장을 했다.

이후 러시아군은 북방으로 밀려나 더 이상 조선군이 파병되지는 않았으며, 한동안 북쪽에서 대치하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청나라와의 국경을 확정한다. 훗날 러시아 제국은 200여 년 후 19세기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동네북이 됐을 때에서야 남진에 성공하여 조선과 재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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