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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효종에서 숙종으로 < 북벌론 >

by 무님 2020.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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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군사력을 길러 청을 정벌하자는 주장이다. 효종 때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한 계획으로 마련되어 숙종 때까지 이어졌지만, 청이 중국 대륙을 완전히 통일하면서 사라졌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계획이었지만 조선의 국방을 튼튼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이 북벌을 계획하게 배경은 임진왜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럭저럭 전쟁 준비를 하긴 했으나(이는 실록에서도 꽤 보인다.)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규모의 일본군에게 개전 초 일방적으로 몰린 조선은 명나라 군대의 지원을 업고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에 반격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전쟁 기간에 명나라는 연인원 20만 이상을 병력으로, 은화 900만 냥 이상을 군사비로 지출하여 조선을 지원하였는데, 이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조선에 끼치는 정치적 입김은 더욱 강해졌고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외교적으로는 명나라와 신흥강국인 누르하치의 후금 사이에서 비교적 유연한 정책으로 또다른 전쟁을 피하는 데 애썼다.

서인 세력은 폐모살제의 죄와 칭제 문제를 명분으로 삼아 인조반정을 일으켜 집권 세력으로 거듭났다. 이들은 처음에는 기미책을 통해 후금과 현상을 유지하는 정책을 취하였으나, 1636년 후금이 칭제건원하고 조선에 대해 명나라와의 국교 단절과 신속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결국은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다. 국왕이 후금의 칸에게 항복의 예를 행하고,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이 볼모로 끌려간 상황은 조선 조야에 충격과 파문을 몰고 왔다.
북벌은 이러한 배경에서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봉림대군(효종)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는 아버지인 인조의 뒤를 이어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북벌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청에 대해 강경론을 펴던 송시열, 이완, 김집 등을 관리로 등용했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발표했다. 남한산성과 수어청을 새롭게 정비하고, 중앙군의 수를 1만 명으로 늘리기도 했다. 당시 바다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다 조선에 흘러들어 온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이 군사 지식을 갖고 있음을 안 뒤에는 그를 시켜 조총을 개량하게 했다. 그는 장차의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위한 군비 강화를 추진하여 훈련도감의 군액을 증대시키고 어영군과 금군을 정비 개편하였으며, 기마병의 확보에 주력하였다. 지방군으로 전체 병력의 다수를 차지하는 속오군 역시 증강되고 훈련이 강화되었다. 군비 강화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거두려 하였고, 노비 추쇄를 엄격히 하였다. 또 친청파인 김자점 등을 제거하고 송시열, 송준길, 김집, 이완 등을 등용하여 북벌의 이념적 지주로 삼았다.

효종은 10년 동안 10만 명의 군사를 길러 준비한 뒤 청을 정벌하자고 했지만 모든 신하가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임금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염려한 신하들, 북벌 준비로 인해 백성들의 부담이 커지는 것을 염려한 신하들은 북벌론에 반대했다. 하지만 신하들이 반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효종의 북벌론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계획이었다. 청은 이미 명에 이어 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강한 나라로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청나라를 치기 위해 북벌론을 계획한 것인가 하는 부분은 오늘날 별로 지지를 얻지 못하며, 현대에 와서는 북벌론은 조카에게 돌아갔어야 할 왕위를 차지한 정통성이 부족한 효종이 내부 지지를 얻고, 인조대에 청의 통제를 받아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조선의 군사체계를 다시 재정비하며 방위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언급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은 조선은 국력에 심각한 타격을 받아 군사력이 약화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청은 각지의 성곽 복구 및 강화에 간섭하면서 조선의 방위력 재건을 통제하였다. 효종은 이런 상황 속에서 북벌을 명분으로 삼아 대동법 등과 같이 내부 제도를 개혁하고 군대를 정비하였으며, 다수의 성곽과 포대를 구축하고 부족한 정통성을 북벌론을 통해 강화하여 지방 산림층의 지지를 받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 송준길로 대표되는 지방 산림층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조정에 입사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지방 산림층에서는 인조 정권을 '오랑캐에 굴복한 조정'으로 여기고 입사하지 않으려 하는 풍조가 있었고, 이 때문에 인조는 인재난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이 입관에 성공하면서 이런 풍조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인조 말년쯤 되면 이들은 조정에 나올 만한 명분이 있으면 나올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효종이 내세운 북벌론은 이런 명분을 제공했다. 이후로 조정에서는 종종 북벌에 대한 논의가 나오게 된다. 다만 이런 북벌론을 이용한 군사력 증강은 산림의 지지는 얻었을 지언정 실무 관료층 및 현실정치에 이미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었던 대신들의 지지는 얻지 못한 듯하다. 특히 이들의 중심 인물인 김육은 대표적인 북벌반대론자로, 이 점에서 효종과 종종 충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육은 죽을 때까지 계속 효종에게 신임받고 중용되었는데, 이는 효종의 북벌론이 실질적인 북벌 계획과는 거리가 있음을 나타내는 한 증거로 꼽힌다.

기축봉사를 예로 들어 '서인들은 말만 앞섰고 효종은 약간이라도 군비를 증강시켰다!'는 주장을 그대로 정설로 하기엔 힘든 것이, 송시열이 오히려 이 북벌의 명분 때문에 효종에게 끌려다녔다는 해석도 있다. 현실적으로 청나라와의 국력 격차는 엄연한 사실이고 북벌의 가능성이 높지 않음을 송시열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북벌을 반대하는 것은, 그 명분을 중시함으로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한 송시열로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때 효종이 그 명분을 앞세워서 북벌론을 주장하며 송시열 등 서인 세력을 압박하자, 위에 언급한 정신을 갈고 닦으며 군비를 증강해야 한다는 등의 신중론을 주장하는 수준으로 물러서며 효종의 국정 운영을 지지하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세월이 흘러 숙종 초에도 윤휴, 허적 등 남인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다시 제기되었다. 북벌을 담당할 기구로서 도체찰사부를 두고, 산성을 축조하고 무과 합격자를 늘리고 전차를 제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하였다. 이는 1674년 청에서 오삼계의 난, 일명 삼번의 난이 일어나 내부혼란이 발생한 것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가 곧 안정을 되찾고 윤휴 일파가 1680년 실각하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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