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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효종 북벌의 꿈 그리고 동반자 송시열

by 무님 2020.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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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 노론의 영수.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 사단칠정이 모두 이라 하여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았다. 주요 저서에는 《송자대전》 등이 있다.

 

송시열의 초상

 

송시열의 본관은 은진(). 아명은 송성뢰(). 자는 영보(), 호는 우암() 또는 우재(). 봉사() 송구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 송응기()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송갑조()이다. 어머니는 선산곽씨()로 봉사 곽자방()의 딸이다.

그. 충청도 옥천군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의 집안이 회덕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9대조인 송명의()가 회덕으로 장가들면서부터다. 그 후손들은 이후 회덕 백달촌에 송씨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그로 인해 이 지역을 송촌(, 현재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이라 불렀다. 백달촌은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며 흙이 비옥하여 농사에 적합한 땅이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1세가 되던 해인 1617년(광해군 9년)부터는 아버지 송갑조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은 송시열의 성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부친 송갑조는 광해군시절, 사마시에 함께 합격한 이들이 인목대비가 있는 서궁에 인사하지 않겠다는 것에 반발하여 홀로 서궁에 찾아가 절을 할 정도로 대쪽 같은 인물이었다. 이 일로 유적()에서 삭제되어 고향으로 낙향하였고, 그 뒤로 두문불출하며 학문과 아들 교육에만 전념했다. 송시열의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주자와 율곡이었다. 그렇게 된 데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 송갑조는 송시열이 열두 살 때 “주자는 훗날의 공자다. 율곡은 훗날의 주자다.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며 주자와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쳤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기묘록()』 등을 배우면서 주자()·이이()·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1625년(인조 3년) 송시열은 19세의 나이로 도사 이덕사의 딸 한산 이씨와 혼인하였는데, 이씨는 문정공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1627년 이후 송시열은 연이은 큰 슬픔을 당하게 된다. 1627년 후금이 조선을 침입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나 그만 맏형인 송시희가 운산에서 전사했고, 22세인 1628년에는 부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부친상을 마친 뒤인 1630년에 송시열은 율곡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율곡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고, 이듬해 김장생이 죽자 그 아들 김집()의 문하에 들어갔다.

1633년(인조 11년) 송시열은 27세의 나이로 ‘일음일양지위도()’를 시제()로 논술하여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고,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곧바로 사직하고 송준길과 영남을 유람하며 세월을 보냈다.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송시열의 나이 43세인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효종은 대군으로 있을 때 사부였다는 인연으로 송시열을 불러 곁에 두고 싶어했다. 효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병자호란으로 중국 심양에서 인질생활을 몸소 겪은 왕이었다. 효종은 즉위하면서 재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산림()들을 대거 중앙 정계에 등용하고자 했고, 대표적인 인물이 스승인 송시열이었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국가 원로들을 궁궐로 초빙했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와신상담할 것을 밝혔다. 화답이라도 하듯이 송시열은 1649년 [기축봉사()]를 올려 북벌론의 합당함을 제시하고 북벌이야 말로 국가대의라는 것을 표방하였다.

[기축봉사]는 밀봉한 채로 효종에게 바쳐졌다. 모두 13개조로 되어 있는 이 봉사에서 송시열은 ‘대일통()’의 큰 뜻을 밝히는 것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밖으로 알려져서는 안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 조목은 ‘슬픔을 절제하여 몸을 보호할 것()부터 정사를 바르게 하여 오랑캐를 맞설 것()’에 이르기까지 군왕으로서 지켜야할 내용들이었다. 물론 여기서 오랑캐란 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송시열에게 중국의 주인은 여전히 청이 아닌 명이었다. 청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은 송시열에게는 패륜이자 반역과 같은 것이었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송시열은 현실로 굳어진 국제관계를 무시하고 유교적인 가르침대로 명을 위해 복수해 줄 것을 당부하고자 했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효종 6)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몇 년간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예송()이 일어나고, 국구() 김우명()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송시열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송시열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송시열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숙종 8) 김석주()·김익훈()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술삼고변()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 해 시장() 없이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에 《송자대전()》 《우암집()》 《송서습유()》 《주자대전차의()》 《정서분류()》 《주자어류소분()》 《논맹문의통고()》 《심경석의()》 《사계선생행장()》 등이 있다.

 

송시열은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개개인마다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그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그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에 배향되었고,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그의 죽음은 신념을 위한 순교로 이해되었고, 그의 이념을 계승한 제자들에 의해 조선사회는 움직였다.

송시열과 관련한 대표적인 지역을 꼽으라면 ‘화양동’일 것이다. 1803년 가을 음성현감이 된 성해응이 부친 성대중과 화양동을 답사하고 지은 [화양도기]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 송시열과 관련한 일화가 전한다. 우암 송시열은 태어날 때 산천의 정기를 타고 나 하루는 세자가 그의 안광을 보고 기절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우암이 기거하던 초당에 매년 봄이 되면 활짝 만개하던 홍매() 한그루가 있었는데 1689년 사약을 받은 해에 갑자기 말라 죽었다. 그러다가 갑술년(1694)에 경술환국으로 송시열의 관직이 회복되자 죽었던 매화가 다시 살아나 꽃을 활짝 피웠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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