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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세조, 피바람 위에 오른 왕좌

by 무님 2020.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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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 수 많은 사람의 목숨을 거두었다. 자기 형제를 죽였으며 자기 조카인 단종의 목숨을 거두었으며 세종이 사랑했던 수 많은 집현전 신하들의 목숨을 거두었으며 무엇보다 문종의 유언을 받은 고명대신인 김종서와 황보인의 죽임으로서 자기 야욕의 시발점을 만들었다. 또한 세조만큼이나 야망가였던 안평대군을 역모로 몰아 주였다. 이런 형에게 반대하던 여섯번째 동생 금성대군은 단종의 복위를 애쓰다 죽임을 당하게 된다

세조가 왕위에 올라 가장 먼저 한 일은 자기의 반대파를 모두 제거하는 일이였으며 많은 피를 흘리였던 것이다.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형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공공연하게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다. 불온분자로 낙인 찍힌 이후 경상북도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인 순흥에는 부사로 있는 이보흠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금성대군은 이보흠을 포섭하여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다. 그러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기도는 허무하게 좌절되었다. 금성대군에게는 금연이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이 여종이 이보흠의 종인 이동과 눈이 맞았다. 이동은 상전인 이보흠과 금성대군이 심상치 않은 일을 꾸민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이 기회로 출세해 보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 이에 금성대군이 작성해 놓은 격문을 훔쳐 달아나 안동부사에게 이 일을 고해바쳤고, 뒤에 이를 안 이보흠도 후환이 두려워 금성대군의 역모 사실을 알렸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은 금성대군뿐만 아니라 단종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세조는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렸고 노산군에게도 사약을 내렸다. 순흥부는 이후로 반역의 고을이 되었다. 순흥부의 토박이 향리들은 거의가 죽임을 면치 못했다. 순흥부는 단종의 신원이 복위되는 숙종 때까지 쑥밭으로 남아 있었다.

세조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정적들을 제거하면서 정치를 안정시켰다. 그 과정에서 신권을 축소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다 보니 문치()보다는 패도() 정치로 변모해 갔다.

 

1457년 세조는 단종이 살아있으므로 해서 자꾸만 일어나는 역모를 끈어 버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상왕으로 있던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킨 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낸다. 단종이 유배를 갔던 청령포는 육지중의 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 홍수로 인해 관풍헌으로 옯겨진다. 그러나 이것도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던 금성대군의 모의가 발각되면서 세조는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다.

 

이리하여 세조는 희대의 폭군으로 악평을 듣게 된다.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일들을 세조가 저지른 것이다. 작은 아버지가 조카를 죽이고 왕이에 올랐다는 것도 그렇고, 조선의 드문 적장자로 왕위 계승을 한 단종을 죽임으로서 정통성을 무너뜨렸던 것이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세조는 13년 3개월의 재위기간 또한 왕권을 강화하고 법전을 만드는 등의 많은 업적을 남기지만 그의 죽음은 편할수가 없었다. 말연의 세조는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이 끔찍하 저주를 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꿈에 현덕왕후가 뱉은 침자리마다 종기가 돋아나고 있다니, 세조은 아연실색했다. 종기는 차츰 온몸으로 퍼지더니 고름이 나는 등 점차 악화되었다."

 

세조는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한평생 피부병에 시달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현덕왕후의 저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또 두 명의 아들이 모두 젊은 나이에 죽느데 큰아들인 의경 세자는 병으로 일찍 죽었고, 세조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8대 임금이 되는 둘째 아들 예종도 왕이 된 지 1년 만에 젊은 나이로 죽겠된다.

 

노후의 세조가 이렇듯 여러가지 불행에 시달렸던건 그가 피로 이른 왕권에 대한 저주라고들 한다. 세조는 죽은 후에서야 자기의 죄값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조선전기 제7대 세조와 왕비 정희왕후 윤씨의 능. 왕릉·왕비릉 있다

 

조선 제7대 왕 세조( 1417~1468, 재위 1455∼1468)와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무덤이다.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7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왕릉 최초로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 형식을 취하였고, 두 능의 중간지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웠다.
세조의 유언에 따라 봉분 내부에 돌방을 만들지 않고 회격(;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으로 처리하였다.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이전에 병풍석에 새겼던 12지신상은 난간석에 새겼다. 능역 아래쪽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인 참도()가 생략되어 있다.

 

광릉 세조의 묘


이렇게 간소하게 능을 조성함으로써 부역인원과 조성비용을 감축하였는데 이는 조선 초기 능제()에 변혁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고, 이런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능 주위에는 문인석·무인석·상석·망주석·석호()·석양()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99-2번지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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