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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284

중종반정의 정국공신 박원종 박원종은 조선 전기의 무신이며 선전내승(宣傳內乘), 동부승지,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등을 지냈다. 중종 옹립의 반정(反正)의 주도적 역할을 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백윤(伯胤). 할아버지는 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事) 박거소(朴去踈)이고, 아버지는 적개좌리공신(敵愾佐理功臣) 박중선(朴仲善)이며, 어머니는 행호군(行護軍) 허균(許稛)의 딸이다. 무술에 뛰어나서 음보(蔭補)로 무관직에 기용되었다. 1486년(성종 17) 선전관으로 있을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내승(宣傳內乘)으로 승진, 오랫동안 왕의 측근이 되었다. 1492년 승정원동부승지로 발탁되자 사헌부에서 나이도 어린데다가 무과 출신에게 동반의 3품직을 제수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해 서경(署經)을 보류하자.. 2020. 4. 13.
중종의 비, 단명왕후 신씨 ( 7일의 왕비 ) 단명왕후 신씨는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의 비다. 중종반정으로 왕후가 되었으나 아버지 신수근이 매부인 연산군을 위해 중종반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반정추진파(反正推進派)에 의하여 살해당하였고, 폐위되었다. 영조 때 복위되었다 단경왕후 신씨는 중종의 조강지처였다. 진성대군이 반정에 성공하여 연산군을 쫓아내고 중종에 즉위하였으나, 이때부터 남편과는 생이별을 하여 평생 중종을 그리워하다 일생을 마쳤다. 신씨는 1487년 1월 연산군과 매부지간인 신수근의 딸로 태어났으며 13세에 진성대군과 혼인하였다. 연산군의 폭정에 반정세력이 형성되고 반정에 성공하여 성종과 정현왕후 사이에 태어난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게 되었다. 왕으로 추대된 중종은 신씨를 사저에 홀로 두고 입궐하였다. 그러나 신씨에게는 남편이 왕으로 추대된.. 2020. 4. 13.
중종시대 관련 사건 - 김공저 박경의 사건 김공저 박경의 사건은 1507년(중종 2) 김공저 ·박경 등이 박원종(朴元宗) ·유자광(柳子光) 등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다. 의관 김공저와 서얼 박경은 중종반정 공신 박원종 ·유자광 등을 간신으로 규정하여, 이들을 제거하고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를 수상으로 삼아야만 정치를 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유숭조(柳崇祖)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의 고발로 발각되었는데, 김공저 ·박경은 참형에 처해지고, 정미수는 울진에 귀양보내졌다. 의관 김공저와 서얼 박경은 중종반정공신 박원종·유자광·노공필을 간신으로 규정하고, 군대를 일으켜 이들을 죽이고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정미수(鄭眉壽)를 수상으로 삼아야만 정치를 잘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자리에는 이장길(李長吉)·장성(長城)·장배.. 2020. 4. 13.
중종시대 삼포왜란 일어나다 삼포왜란은 1510년(중종 5) 부산포(釜山浦)·내이포(乃而浦)·염포(鹽浦) 등 삼포(三浦)에서 거주하고 있던 왜인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난이다. 경오년에 일어났으므로 ‘경오왜변(庚午倭變)’이라고도 한다. 조선은 건국 후 국방 문제를 감안, 무질서하게 입국하는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1407년(태종 7) 부산포(富山浦 : 東萊)와 내이포(乃而浦, 일명 薺浦 : 熊川), 1426년(세종 8) 염포(鹽浦 : 蔚山) 등 삼포를 개항하고 왜관(倭館)을 설치, 교역 또는 접대의 장소로 삼았다. 조선에서는 이 삼포에 한하여 일본 무역선의 내왕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무역과 어로가 끝나면 곧 돌아가게 하되, 항거왜인(恒居倭人)이라 하여 거류한 지 오래된 자 60명만을 잠시 잔류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왜.. 2020. 4. 13.
인종을 저주하다 '작서의 변' 작서의 변은 1527년(중종 22) 3월 쥐를 잡아 동궁(東宮: 뒤의 인종)을 저주한 사건이다. 인종은 1520년(중종 15) 세자로 책봉되었다. 25년 간 세자의 자리에 있다가 1544년 즉위하였다. 이듬해 기묘사화로 파방된 현량과(賢良科)를 복구하였다. 또한 조광조(趙光祖) 등의 기묘명현을 신원하였다. 성품이 조용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깊고 형제 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3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1522년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 차례씩 글을 읽었다. 동궁으로 있을 때는 화려한 옷을 입은 시녀를 궁 밖으로 내쫓을 만큼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형제 간의 우애가 돈독해, 누이 효혜공주(孝惠公主)가 어려서 죽자 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깊어 병을 얻.. 2020. 4. 13.
중종, 기묘사화 '선비들의 죽음' 기묘사화는 네 개의 사화 중에서 ‘선비들의 피화’라는 의미에 가장 적합한 사건일 것이다. 그것은 삼사의 영향력이 대단히 팽창했을 때 국왕과 일부 대신이 그 관서를 이끈 주요 인물들을 전격적으로 숙청한 사건이었다.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이 숙청된 사건이다. 조광조와 기묘사림이 삼사를 장악해 강력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중종의 확고한 신임이었다. 특히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는 그야말로 물과 고기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각별했다. 등용된 지 2년 반만에 당상관에 오르고(조광조는 1515년(중종 10년) 6월에 벼슬을 시작해 1517년 윤12월 직제학이 되었다), 짧게는 사흘부터 보통.. 2020. 4. 12.
중종 실록 은 조선왕조 제11대 왕 중종의 재위기간 1506년 10월에서 1544년 11월에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이다. 그러나 제105권에는 인종이 즉위한 1544년 11월 16일부터 12월 말일까지의 기사가 합편되어 있다. 정식 이름은 이며, 모두 105권 102책으로 활판으로 간행되었다. 은 인종 때에 그 쳔찬이 계획되었으나. 당시 대, 소윤 정쟁이 격렬하였고 인종이 재위 9개우러 만에 세상을 떠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명종이 즉위한 뒤에도 을사사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바로 착수하지 못하다가, 명종원년인 1546년 가을에 비로소 춘추관에 실록청을 두고, 과 함께 편찬에 착수하였다. 명종 5년인 1550년 10월, 시작한 지 5년 만에 재위 39년간의 기록을 실은 1백5권이 완성되어 각 사고에 봉인되었다. .. 2020. 4. 10.
연산군시대 사간 이극돈 이극돈은 조선 전기의 문신. 좌리공신 4등으로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졌다. 성절사,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고(士高). 이집(李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지직(李之直)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이며, 어머니는 노신(盧信)의 딸이다. 1457년(세조 3) 친시 문과(親試文科)에 정과로 급제해 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에 임명되고 1459년(세조 5) 형조좌랑이 되었다. 1461년(세조 7) 통례문판관에 이어 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세자시강원필선 등을 지내고, 1467년(세조 13) 호군(護軍)으로 부산포에서 유구국 사신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사헌부집의로 임명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刑典)·호전(戶典) 중에서 잘못된 곳을 지적하고, 불.. 2020. 4. 10.
조선 16대 왕 - 인조 조선의 제16대 왕(재위 1623~1649) 인조는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 정책을 썼다. 난국 속에서도 군제를 정비해 총융청 · 수어청 등을 신설했으며, 북변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하여 여러 곳에 진을 신설했다.《동사보편》등의 서적도 간행되었고, 송시열 · 송준길 등의 대학자·대정치가가 배출되기도 했다 인조는 반정이라는 거사를 직접 진두지휘 하였다. 인조는 계획이 여러 사람들 입을 통해 누설될 위기에 처해지자 서두를 수 밖에 없었고 조바심에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인조는 예정일 보다 일찍 반정을 일으켰고 이런 탓에 치밀하지도 못한 느낌이지만, 군왕이었던 광해군은 무방비 상태였다. 광해군이 도망간 이상, 인조는 왕위에 오른 것이나 진배없었다. 1623년 김류(金瑬)·김자점(金自點)·이.. 2020. 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