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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이야기25

고려 제4대 왕 - 광종의 가계도 광종의 후비는 대목왕후 황보씨와 경화부인 임씨 두 사람뿐이다. 두 사람 중 경화궁부인 임씨는 자식을 낳지 못했고, 대목왕후 황보씨는 경종을 비롯하여 2남 3녀를 낳았다. 경종의 동생 효화태자는 후사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일찍 죽은 것으로 보인다. 세 공주 중에서 첫째는 천추전군에게 시집간 것으로 괴어 있어 천추전부인으로 기록되어 있고, 둘째는 보화궁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왕족 중 한 명에게 시집간 것으로 보이며, 셋째는 서종의 왕비 문덕왕후 유씨이다. 1. 대목왕후 황보씨 (생몰년 미상) 대목왕후 황보씨는 태조의 딸로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의 소생이다. 그녀의 성씨 황보는 어머니 쪽을 따른 것이다. 광종과 대목왕후의 결혼은 937년 이후부터 943년 이전에 이뤄진 것으로 짐작된다... 2021. 4. 24.
고려 제4대 왕 광종의 공포정치의 시작과 끝 광종은 재위 초반까지는 그래도 호족들의 세력을 존중해주면서 공존하는 형태로 국정을 이끌었지만 재위 중반부터는 자신의 의욕적인 왕권 강화 정책에 대해 분노한 호족들의 반발과 그들의 암살 위협에 철저히 대응하기 위해 반대파는 물론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말 그대로 다 죽이거나 잡아 가두는 공포 정치로 국정을 이끌었다. 960년인 광종 11년 권신의 역모에 대한 고변으로부터 광종의 공포정치는 시작됐다. 평농서사 권신은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 등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참소했던 것이다. 당시 광종은 개경을 황도라고 하고 '준풍'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공포하면서 스스로 황제의 위상을 갖추고자 하였다. 이는 곧 절대왕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대신들 중에는 광종의 이 같은 행동에 대한 불만을 품은 사람이 .. 2021. 4. 20.
고려 제4대왕 광종의 정책 광종은 즉위 후 7년 동안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정국을 지켜 보았다. 정국의 지휘권을 호족에게 내어주고 그들을 지켜보며 왕권강화의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953년 후주와 본격적인 외교관계가 성립되면서 암암리에 개혁작업을 시도하게 된다. 광종의 정책은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으로 칭제건원. 수도 제도 개편. 귀화인 쌍기 영입. 불교 통합이 있었다. 칭제 건원은 광덕(光德)이나 준풍(峻豊) 등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해 사용하고 한국사 역대 군주 중 최초로 공식적으로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면서 자주 의식을 표방했다. 이전에도 신라나 발해의 다른 임금 대에도 비공식적으로 임금을 황왕, 황상이라 칭하는 등 소극적으로 칭제건원을 했지만 광종처럼 노골적으로 황제국임을 선포한 적.. 2021. 4. 18.
고려왕조실록 - 광종실록 광종은 신명순성왕후 유씨 소생이며 이름은 소, 자는 일화이다. 소는 925년 태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949년 3월 동복형 정종의 선위를 받아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광종은 왕자 시절에 정종과 더불어 왕실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고, 박수겨, 수문 형제와 왕식렴 등의 서경 세력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때문에 왕규와 박술희가 이끄는 개경 세력을 제거하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정종의 즉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이복형 혜종과도 친분을 가지면서 서경 세력과 혜종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하였다. 광종은 정종과는 판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치밀하고 조심스럽지만, 기회를 잡았을 땐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대범한 성격이었다. 최승로는 그가 특이한 풍채와 우수한 자질을 가지오 있어 태조로부터 남다른 사랑.. 2021. 4. 12.
고려 제3대 왕 정종의 가계도 정종은 문공왕후 박씨, 문성왕후 박씨, 청주남원부인 김씨 등 3명의 부인을 두었다. 그리고 문성왕후 박씨에게서 경춘원군과 공주 1명을 얻었다. 문공왕후와 문성왕후는 친자매로 견훤의 사위 박영규의 딸이다. 이들은 또한 태조의 제17비 동산원부인 박씨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이러한 삼중결혼은 고려 왕실에서도 아주 드문 경우에 해당하는데, 태조의 후백제 호족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이는 후백제 세력을 달래는데 박영규의 영향력이 지대했음을 보여준다. 청주 남원부인 김씨는 원보 김긍률의 딸이며 혜종의 제3비 청원부인의 김씨의 친동생이다. 청주 호족 김긍률은 당시 충주 유씨와 더불어 유력한 호족중의 하나였는데, 원래는 태조 생존시 혜종에게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혜종의 세력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하지만 .. 2021. 4. 10.
고려왕조실록 - 정종 실록 정종은 고려 시대의 제3대 왕(재위 945~949)으로 정적을 제거하며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왕요(王堯). 자는 천의(天義). 태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충주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이다. 비(妃)는 문공왕후 박씨(文恭王后 朴氏)와 문성왕후 박씨(文成王后 朴氏)이다. 정종 왕요는 923년에 태어났다. 그는 신명순성왕후의 두 번째 소생이며 태조 왕건의 셋째 아들이었다. 하지만 신명순성왕후의 첫 번째 소생인 태가 어린 나이로 죽는 바란에 그가 차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왕요는 태조의 차남이었지만 그는 장남 혜종보다는 지지기반이 튼튼하였다. 강력한 호족 세력인 충주 유씨가 그의 외가였기 때문이다. 혜종이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945년 9월 측근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 2021. 4. 8.
고려 2대 혜종의 가족관계 와 순릉 혜종은 의화왕후 임씨를 비롯 후광주원부인 왕씨, 청주원부인 김씨, 궁인애이주 등 4명의 부인에게서 2남 3녀를 얻었다. 의화왕후 임씨는 대광 임희의 딸로 921년 12월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태자 무와 혼인하였으며 943년 5월 혜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에 책봉되었다. 호족으로 아버지 임희가 병부령, 즉 고려의 국방부장관을 지냈으며 왕후의 친척들도 군부에 속해 있었다. 시아버지 태조는 의화왕후를 혜종이 정윤으로 임명됐을 때 같이 정윤비로 봉했다. 태조가 병부령의 딸을 혜종과 결혼시킨 건 권력이 약한 혜종이 군부와 결혼으로 연합하기 바랬길 때문. 아들로 흥화군(興化君), 흥화낭군(興化郎君)이라고도 불리는 흥화궁군(興化宮君)이 있었는데, 본명이 아니라 군호로 "흥화궁(興化宮)을 하사받은 가신(家臣)" 이라는 .. 2021. 3. 29.
고려 2대 왕 혜종 - 주름살 왕으로 불리다 혜종은 태조와 장화왕후 오씨의 장남으로 912년 나주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은 무, 자는 승건이다. 태조의 제1비 신폐왕후 유씨가 소생이 없었던 탓으로 아들을 보지 못했던 왕건은 나주의 미천한 집안 출신 오씨로부터 첫아이를 얻었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태자 무의 출생과 관련하여 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하나를 전하고 있다. ' 궁예의 신하로 있던 시절 왕건은 나주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오씨를 만났다. 이때 왕건은 비록 동침은 했지만 그녀의 출신이 미천한 것을 염려하여 임신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하였는데, 오씨가 이것을 즉시 흡수하여 임신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달 후 아이를 낳았더니 이상하게도 아이의 이마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 물론 이것은 .. 2021. 3. 24.
고려왕조실록 - 혜종 실록 혜종은 고려전기 제2대(재위:943~945) 왕이다. 자는 승건(承乾), 휘(諱)는 무(武), 시호는 의공(義恭)이다. 태조 왕건(王建)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며, 비(妃)는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인 의화왕후(義和王后)이다. 태조는 궁예 휘하에서 나주를 정벌하고 그곳에 주둔할 때, 오씨를 만나 혼인하였다. 나주 오씨 집안의 세력은 권력이나 군사력을 갖지 못했으며 이러한 출신 배경으로 혜종은 후에 왕위쟁탈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왕건은 장남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고 싶었으나 호족들의 눈치를 살펴야하는 입장이었기에 그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못했다. 그것은 왕자 무의 어머니 오씨가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왕건의 뜻을 알아차린 대광(재상) 박술희는 마침내 .. 2021. 3.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