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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284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조선의 문을 닫게 만들었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고종 5년(1868년),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유대인 상인이자 자칭 인류학자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년 - 1903년)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생부 남연군 구(球)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굴총(掘塚) 사건이다. 덕산 굴총 사건이라고도 한다. 1868년 4월 제3차 한반도 답사를 계획, 한때 상하이 미국 영사관에 근무한 미국인 모험가 프레더릭 헨리 배리 젠킨스(Frederick Henry Barry Jenkins)를 자본주로 하고, 프랑스인 선교사 스타니슬라스 페롱(Stanislas Féron,1827년 ~ 1903년) 신부를 통역관 겸 보좌관으로 대동하여 차이나호(號)에 백인 8명, 말레이시아인 20명, 조선 천주교도.. 2020. 11. 11.
흥선대원군 이하응 쇄국정책을 펼쳤다 <통상수교거부정책> 쇄국정책이란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지 않고 문호를 굳게 닫아 서로 통상하지 않는 정책 않는 것으로 통상수교거부정책이라 한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부터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중국과 일본 두 나라와 폐쇄적인 사대교린관계만을 유지하였다. 더욱이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 구미 자본주의 나라들이 통상무역을 요구해옴에 이르러서는 좀 더 완강한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근대 구미 자본주의 나라들은 일찍부터 면업을 기축으로 산업혁명을 완료하고, 1820년대에 나타난 과잉 생산으로 최초의 공황을 맞으면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자본주의 나라들의 아시아 진출의 목적이 원료공급지와 상품판매시장의 획득에 있었음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이리하여 아시아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형성은 중국과 일본의 개항으로.. 2020. 11. 11.
열악한 상황에 놓인 구식군대의 정변 < 임오군란 > 임오군란은 1882년(고종 19) 6월 9일 훈국병(訓局兵)들의 군료분쟁(軍料紛爭)에서 발단해 고종 친정 이후 실각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변(政變)이다. 1876년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은 조선 왕조는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진보적 성향의 개화파와 보수적인 위정척사파간의 갈등은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한편 조선 정부는 기존의 5군영을 무위(武衛)·장어(壯禦)의 2영으로 통폐합하고 일본의 후원 하에 '별기군(別技軍)'이라 불리는 신식 군대를 창설하여 일본인 교관과 조교의 지도 아래 훈련을 실시했다. 2영의 구식 군인들은 별기군에 밀려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급료조차 제때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을 맞았다. 이에 군인들은 일본의 후원을 등에 업은 별기군과 그.. 2020. 11. 10.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신미양요로 * 제너럴 셔먼호 사건 신미양요의 원인은 1866년(고종 3)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서 군민(軍民)의 화공(火攻)으로 불타버린 일이다. 1866년은 조선의 대외교섭사에 있어 중요한 한 해였다. 그해 초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정책(禁壓政策)에 따라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도 수천 명을 죽이는 이른바 병인사옥(丙寅邪獄)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조선의 배외 감정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오리라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그해 8월 정체 불명의 이양선(異樣船) 1척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왔다. 이것이 바로 제너럴셔먼호였다. 셔먼호는 원래 미국인 프레스턴(Preston,W.B)의 배였다. 그런데 프레스턴이 톈진(天津)에 기항하고 있.. 2020. 11. 9.
병인박해에서 병인양요로 병인박해는 1866년 조선 조정(朝廷)에서 가톨릭 교도를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원인(遠因)은 당시 시베리아를 건너온 러시아의 남하(南下)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1864년(고종 1)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 교도들은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를 한·불·영 3국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으니 당시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조정에서 이미 러시.. 2020. 11. 8.
조선 26대 왕 고종 < 이희 > 조선의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다. 재위 기간은 1863∼1907이며 아명은 이명복(李命福), 초명은 이재황(李載晃), 후에 이희로 개명, 자는 성림(聖臨), 후에 명부(明夫)로 고침, 호는 성헌(誠軒). 영조의 현손(玄孫)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이다. 1863년(철종 14)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趙大妃)의 전교(傳敎)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나, 대정(大政)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즉위 후인 1866년 9월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 2020. 11. 6.
조선왕조실록 < 고종실록 > 은 조선왕조 제 26대 왕이며 대한제국의 첫 황제였던 고종의 재위기간인 1863녕 12월에서 1907년 7월까지인 45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원명은 이다. 본문 48권 48책과 목록 4권 4책을 합쳐 52권 52책으로 간행되었다. 은 과 함께 이왕직의 주관으로 1927년 4월1일에 편찬을 시작하여 7년이 지난 1934년 6월에 완성되었고, 이듬해 3월 31일에 완료되었다. 의 편찬에 참여한 편찬위원들은 아래와 같다. 위원장 : 소전치책, 부위원장 : 이항구, 감수위원 : 소전성오, 정만조, 박승봉, 성전석내, 김여수, 서만순, 편찬위원 : 서상훈, 남규희, 이명상, 조경구, 홍종한, 권순구, 사료수집위원 : 박주빈, 이원승, 이능화 등이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 2020. 11. 4.
동학의 탄생 선 후기에 등장한 새로운 종교로는 서학, 동학, 예언사상이 있다. 서학은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와 과학기술을 합친 것으로 조선 사회 안으로 잘 녹아 들지는 못했다. 서학에 맞서 최제우가 민간 신앙과 유교, 불교 등을 융합해 동학을 창시했고 조선 말기에는 많은 예언 사상이 쏟아져 나왔다. 세도 정치기의 사회 혼란 속에서 기성 종교인 불교와 유교가 종교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이 틈을 이용하여 외래 종교인 천주교가 점차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서양 종교인 천주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시하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는 등 우리의 고유한 풍속을 해치고 있었다. 그래서 천주교의 확산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지배층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많았다. 바로 이러한 때.. 2020. 11. 2.
임술민란의 도화선 < 진주 농민 봉기 > 조선 철종 때인 1862년, 경상도 진주에서 관리들의 횡포에 저항하며 농민들이 일으킨 봉기이다. 이 해 전국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잇달았으며, 고종이 임금이 된 후에도 계속되어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 후기에 사회모순이 전면화되는 상황에서 일어났다. 그 첫째로 농업 생산력과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농민층이 급속히 분해되었으며, 그 결과 자영농민층의 몰락이 심화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지주와 소빈농(小貧農)·작인(作人) 사이에 경제적 이해를 둘러싼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둘째, 위정자들도 '삼정의 문란'이라고 걱정할 정도로 조세를 둘러싼 폐단이 심각하였다. 조세문제는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키면서 제기한 문제에 잘 나타나 있다. 농민들은 각종 조세가 토지에 집중 부과.. 2020.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