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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15

조선 16대 왕 인조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다 인조의 자 화백(和伯). 호 송창(松窓). 휘 종(倧). 선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원군(定遠君:元宗으로 追尊), 어머니는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비는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 계비(繼妃)는 조창원(趙昌元)의 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졌다가 후에 능양군(綾陽君)으로 진봉되었다. 조선 16대 왕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定遠君, 뒤에 元宗으로 추존됨)과 좌찬성 구사맹의 딸(뒤에 인헌왕후로 추존) 사이에서 맏아들로 1595년 11월 7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인조가 해주에서 출생한 것은 왜구의 침입으로 왕족들이 해주에 피신 중이었기 때문이다.인조의 조부가 되는 선조는 14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늙어서 얻은 영창대군 외에.. 2020. 4. 9.
광해군, 대동법의 시행하다 임진왜란을 겪고 조선의 어느 한곳 멀쩡한 곳이 없었다. 광해군은 왕위에 올라 세금개혁의 일환이라 할 수 있는 대동법을 시행한다. 대동법이란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세금 제도이다 대동법을 이해하려면 공납을 알아야 한다. 공납이란 그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특별한 상품인 특산품을 세금으로 걷는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나거나 흉년이 들어 특산품을 생산하지 못한 경우 세금을 낼 수 없게 되어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렇다고 다른 물건으로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라에서 걷어야 할 물건의 종류와 수가 정해져 있어 함부로 다른 물건을 대신 바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공납을 내지 않으면 더 큰 벌을 받게 되기 때문에 다른 마을에서 물건을 사서 바치거나, 아니면 중간 상인.. 2020. 3. 28.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강홍립 장군 광해군은 선조의 적장자였던 영창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명나라가 쇠퇴하고 후금이 세를 일으키던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두 세력의 중간에서 균형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것을 중립외교란 한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사림들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폐위된다. 광해군은 왕족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전쟁을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의 대외정책 제1순위는 전쟁 발생 방지였다. 당시 동아시아의 세력도는 요동치고 있었다. 명나라는 조선 파병으로 재정이 고갈되어 약해지고 여진족은 급격하게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마침내 여진족은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에 선전포고까지 한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를 전쟁에서 조선을 구해준 슈퍼 히어로로 생각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후금을 막을 지원병.. 2020. 3. 28.
조선 15대 왕 광해군 - 폐모살제 그리고 인조반정 임진왜란의 막이 내렸다. 의인왕후 사후 선조는 계비를 간택, 1606년 선조의 계비가 된 인목왕후가 그 후 영창대군(적자)을 낳자, 광해군을 내심 탐탁치 않게 여기고 미워하던 부왕 선조는 다시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고, 소북파의 유영경 등도 적통론을 내세워 영창대군 옹립계획을 세운 선조를 지지하였다. 특히나 선조 자신이 서얼에다가 방계승통을 했다는 콤플렉스까지 겹치면서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그러나 선도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며 임진왜란 동안 많은 공을 세운 광해군이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1609년 광해군은 자신의 세자 책봉 과정에서, 장자 승계 원칙을 주장하며 자신을 압박하던 명나라가 활용하던, 친형제이자 장자 임해군을 .. 2020. 3. 28.
광해군, 개혁과 중립외교를 펼치다 임진왜란이 한참 일어나고 있는 시기 14대 임금 선조는 의주로 도망을 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영변(寧邊)에서 갈라졌다. 선조는 의주로 향하고 광해군은 권섭국사(權攝國事)의 직위를 맡아 분조(分朝)의 책임자로 평안도 지역으로 출발하였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을 수복한 후 무군사(撫軍司)의 업무를 담당하여 수도 방위에도 힘을 기울였다. ;1597년 정유재란(임진왜란 중 왜군의 2차 침략을 따로 부르는 말)이 일어났을 때는 전라·경상도로 내려가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 2020. 3. 24.
조선 15대 왕 광해군 - 이혼 조선 15대 왕 광해군은 1575년에 태어나 1641년에 사망했다. 재위기간은 1608년에서 1623년으로 15년 1개월이다. 조선의 제 14대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서 선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조는 당시 왕비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고, 후궁 공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장남 임해군과 차남 광해군을 두었다. 그런데 임해군은 성품이 포악해 광해군이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서야 세자초 책봉된 광해군은 전장을 누비며 저재으이 총사령관 역활을 충실히 하며 백성들을 위로한다. 전쟁 이후, 아버지 선조와 새 왕비 인목왕후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왕위 세습의 위협을 받지만, 얼마 되지 않아 선조가 승하하면서 조선의 제 15대 왕으로 즉위한다.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되기전 세자 .. 2020. 3.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