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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25

이순신장군 임진왜란 그리고 백의종군 조선 14대 왕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통신사로 파견된 황윤길의 상소를 무시하고 김성일의 상소를 채택한다. 일본은 전쟁을 일으킬 의사가 없다고 판단을 한다. 이 판단의 근거는 누구도 전쟁준비를 시작해서 생길 문제들에 대한 비난을 피하려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조선에서 유일하게 전쟁 준비를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1589년(선조 22) 이산해(李山海)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나서게 된 이순신은 감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조방장(助防將)과 선전관(宣傳官) 등을 거쳐 정읍현감이 되었으며, 1591년(선조 24)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全羅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영(全羅左水.. 2020. 3. 23.
이순신 32세 무관에 합격, 47세 전라도좌도 수군군절도사가 되다. 이순신장군하면 여러가지가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나라를 사랑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그리고 전장에서 승리를 이끌며 죽어간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충무공 이순신이라 불리는 한 남자를 파란만장한 삶을 떠올린다. 이순신의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45년(인종 1)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漢城府) 건천동(乾川洞, 현재 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와의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보성군수 등을 지낸 방진(方震)의 딸인 상주 방씨(尙州方氏)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며, 이 밖에 해주 오씨(海州 吳氏)와의 사이에 2남 2녀가 있었다. 이순신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 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조인 .. 2020. 3. 22.
임진왜란의 종결과 조선의 상황 임진왜란은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명·일본 등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하기 시작한 사회가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로 나타났다.전화(戰禍)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국적으로 전야(田野)가 황폐화되었다. 사회적으로는 군공이나 납속으로 서얼허통(庶孽許通), 향리(鄕吏)의 동반직(東班職) 취임, 병사의 면역, 노비의 방량(放良) 등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해져갔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다. 역대 실록을 포함하여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한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난중의 민중의 생활은 더욱 궁핍하여 인상.. 2020. 3. 21.
조선 14대 왕 선조 - 정유재란 조선 14대 왕 선조 시대에는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특히 왜의 침입인 임진왜란은 내외적으로 혼란하고 전쟁에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더욱 치열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잠시 휴정에 들어가지만 일본 다시 침략해 온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정유년에 일어난 왜의 침입일하여 정유재란이라 한다. 1597년 화의 결렬로 일본의 도요토미는 재침의 명령을 내렸다. 먼저 가토·고니시·소 등을 장수로 한 1만 4500명의 군사를 선봉으로 정월 15일 조선을 침략하였다. 가토는 울산·죽도의 구루(舊壘)를 수축하고 부산의 수병(戍兵)을 합하여 잠시 기장에 주둔했다가 이어 양산을 거쳐 울산 서생포에 들어가 둔진하였다. 고니시는 앞서 지난해 말에 두모포(豆毛浦)로 상륙하여 2월에 부산의 원영(原營)을 수복하고 영주.. 2020. 3. 21.
임진왜란의 휴전 성립 앞서 선조는 피난 도중에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에서는 파병 여부의 의논이 분분했으나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주장으로 원병을 파견하였다. 이에 요양부총병(遼陽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은 5,000의 병사를 이끌 고 고니시의 본거지인 평양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들 원병은 명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군사는 아니고 국경 수비병이었다. 그들은 1592년 7월 15일 평양에 도착하여 풍우가 심한 밤을 이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적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우참장(右參將) 대조변(戴朝弁)과 유격(遊擊) 사유(史儒) 등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조승훈이 잔여병을 거두어 퇴각하니 1차 구원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고니시는 임진강에서 대진하고 있을 때와 대동강에 이르러 두.. 2020. 3. 21.
임진왜란의 발발 조선은 일본의 태도를 심상치 않게 여기고 1590년 동인의 김성일과 서인의 황윤길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한다. 그리고 이들은 1년 뒤인 1591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에 선종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난 일을 보고한다. 그런데 문제는 김성일과 황윤길인 상반된 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 상이 하문하기를 "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어썽헤 생겼던가?" 하니, 윤길이 아뢰기를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하고, 성일은 아뢰기를 "그이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의 앞날의 크나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은 김성일의 의견을 받아들이는데 이는 누구도 전쟁에 대한 중압감과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고 또한 민심이 나빠질가 걱정.. 2020. 3. 21.
임진왜란의 배경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중쇠(中衰)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 세력간에 계속된 정쟁으로 인한 중앙 정계의 혼란,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했으나, 이것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이(李珥)는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 2020. 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