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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이야기

논리로 80만 대군을 물리친 < 서희와 강동 6주 >

by 무님 2021.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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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광종 대에 대광 내의령을 지낸 서필의 아들이다.

서희의 아버지 서필은 광종의 귀화인 중용정책에 반대했던 인물로 사치를 싫어하고 스스로 검소하여 몇 번에 걸쳐 왕의 사치를 경계하는 간언을 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서희는 943년 서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이천이고 아명은 염윤이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곧고 머리가 뛰어났던 그는  광종 11년 만에 18세로 갑과에 급제한 후 광평 원외랑 등을 지내며 승진을 거듭하였다.

972년 송나라 사신으로 가서 10여 년간 단절되었던 송과의 외교관계를 회복시키면서 처음으로 외교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때 송의 태조는 서희의 절도 있는 행동과 예법을 높이 평가하여 검교병부상서 벼슬을 내렸다.

 

송나라에서 돌아온 후 서희는 탁월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좌승을 거쳐 983년에 정3품 병관어사에 올랐다. 

933년 정2품 내의시랑에 있을 때 거란이 침입하자 중군사에 임명되어 시중 박양유와 문하시랑 최향과 함께 북계로 진출하여 방어전략을 세웠다. 

 

 

고려사 원문

 

 

거란의 1차 침입 < 서희의 담판 외교 >

 

거란은 요를 세우고 막강한 힘을 형성하여 중원을 압박하는 동시에 고려와 여진에도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란과 외교를 단절하고 송과 접촉하였고, 거란은 이에 불만을 품고 동경 유수 소손녕으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케 하여다.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 소손녕은 일시에 봉산군을 격파하였으며, 많은 고려군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고려 조정에 서한을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 소손녕은 자신들이 이미 발해를 멸망시켜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고려가 고구려 땅 일부를 차지했기에 자신들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정벌에 나섰다." 주장했다.

이 서한을 접하고 서희는 성종에게 화의의 가능성이 보인다고 보고를 올렸다.

 

 위력을 과시하고자 안융진을 공격했던 거란군이 패배하자 소손녕은 더 이상 공격을 감행하지 않고, 계속해서 항복을 종용하는 서한을 보내 고려에 면대를 요청해왔다.

 

성종은 소손녕의 면대 요청에 응하기로 하고 서희를 적진에 보냈다.

 

* 고려사 원문 번역문

서희(徐熙)가 국서(國書)를 받들고 소손녕(蕭遜寧)의 진영에 가 통역관을 시켜 서로 인사하는 예(禮)를 물었는데, 소손녕이 “나는 대조(大朝)의 귀인(貴人)이라 마땅히 뜰에서 절하여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신하가 군주에게 아래에서 절하는 것이 예법이지만 양국 대신이 서로 보는데 어찌 이와 같이 하리오” 하였다. 이렇게 두세 번 말해도 소손녕이 받아들이지 않자, 서희가 노하여 관사로 돌아와서는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소손녕이 기이하게 여기고는 당(堂)에 올라와서 서로 예를 행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서희가 영문(營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들어가 소손녕과 함께 뜰에서 서로 읍(揖)하고 당에 올라 예를 행하고는 동서(東西)로 마주 앉았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그대들이 침범해왔다. 또 (고려는)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바다를 넘어 송(宋)을 섬겼으므로 이제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이다. 만일 땅을 떼어서 바치고 통교한다면 무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국토의 경계로 말한다면 상국(거란)의 동경(東京)은 전부 우리 지역 안에 있는데 어찌 영토를 침범한 것이라 하는가? 그리고 압록강의 안팎 또한 우리의 지역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사이에 도둑질하여 차지하고는 교활하게 대처하고 있어 길의 막힘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심하니 조빙의 불통은 여진 때문이다.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 옛 땅을 되찾아 성과 요새를 쌓고 도로를 만들면 어찌 교빙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일 신의 말을 천자에게 전하면 어찌 가엾이 여겨 흔쾌히 받아들이지 아겠는가?”라고 하였다. 말하는 기운이 매우 강개하므로 소손녕은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는 드디어 사실을 정리하여 아뢰었다. 거란의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가 이미 화해를 청하였으니 마땅히 군대를 해산할 것이다” 하였다. (중략)

서희가 거란 군영에 7일이나 머물다 돌아오는데 소손녕이 낙타 10수(首), 말 100필, 양 1000두와 비단 500필을 주니 성종이 크게 기뻐하여 강나루까지 나아가 그를 맞이하였다. 곧바로 박양유(朴良柔)를 예폐사(禮幣使)를 삼아 (거란) 조정에 들어 보내려 하니 서희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고 옛 땅을 수복한 후에야 요나라 조정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겨우 강 안쪽을 수복했으니 강의 바깥쪽을 얻기를 기다린 뒤에 예폐사를 파견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성종이 말하기를, “오래 수빙(修聘)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라며 드디어 사신을 보냈다. (서희는) 평장사(平章事)에 전보(轉補)되었다. 그는 성종 13년(994)에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쫓아내고 장흥(長興)⋅귀화(歸化) 두 진(鎭)과 곽주(郭州)⋅구주(龜州) 두 주(州)에 성을 쌓았으며, 이듬해에 또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安義)⋅흥화(興化) 두 진(鎭)에 성을 쌓고 또 이듬해에 선주(宣州)⋅맹주(孟州) 두 주(州)에 성을 쌓았다.

 

                                                                                                『고려사』권94, 「열전」7 [제신] 서희

 

 

소손녕과의 담판 이후 거란과의 회의가 성립되었고, 서희는 이듬해부터 압록강 동쪽 장흥진, 귀하진, 곽주, 구주 등에 강동 6주의 기초가 되는 성을 구축하여 여진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고려는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확대하였다. 이때 구축한 강동 6주는 후에 조선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까지 뻗어 가는 기반이 된다.

 

이후 서희는 종1품 태보내사려에 임명되었으나 966년인 성종 15년 병을 얻어 개국사에 요양해야 했다. 서희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어 근무할 입장이 되지 못하자 성종은 그에게 치사령을 내려 쉬도록 하였다.

요양을 하고 있던 서희는 성종이 죽고 난 목종 원년에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현종 18년에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덕종 2년 태사 벼슬이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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